독거의 가치
주말에 오랜만에 주말 약속이 잡혔다. 헬스장에 가자마자 스미스머신에 들어가서 준비 운동도 없이 원판을 두 개씩 꽂고 바로 스쿼트에 돌입했다. 대퇴부 근육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끙끙댔다. 허리께 요추가 말리지 않는지 꼼꼼히 살폈다. 어느새 둔근에도 쪼개지는 자극이 들어갔다. 난 과격하게 고관절을 튀겨 고통을 불러들였다. 아무도 날 보지 않지만 누군가를 의식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몸이 쇠와 하나가 되어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뇌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민첩하고, 차분하다가도 갑자기 강렬한 에너지에 몸이 덜덜 떨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렬한 자극이었다.
최근 이토록 열심히 운동을 한 적이 없었다. 마치 처음 쇠를 잡아보는 사람처럼 몸이 뒤뚱거렸다. 하지만 느닷없이 잡힌 약속 하나에 난 더 오버를 해서 원판을 하나씩 추가로 꽂고 스쿼트를 마무리했다. 헬스장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남자들 뿐이었다. 밀폐된 공간이어서 그럴까. 그야말로 그들은 강렬한 수컷 냄새를 풍겼다. 내 옆에서 스미스머신을 쓰는 대머리 아저씨는 험한 말을 내뱉다가 갑자기 킬킬거리기도 했다. 미쳤나? 뭐랄까. 그들은 그 순간 소년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다들 무슨 이유가 됐든 몸이 뜨거워진 것이다. 난 주말 약속, 저 남자는 뭐가 있을까. 저러다가 분명히 샤워실에서 물 좀 끼얹고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착실하고 예의 바른 중년 남성이 될 것이다. 어쩐지 조금은 머쓱한 표정이 되어 아저씨는 일상의 침묵 속으로 사라질 테지. 그러고는 다시 돈 문제, 일 문제, 사람 문제, 누가 보면 가져다 버리고 싶은 가족 문제에 골머리를 썩을 것이다. 상남자가 된 것 같은 허풍은 이 작은 아파트 헬스장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오랜만에 잡힌 약속 하나에 신이 나 있는 나는 저 아저씨와 뭐가 다를까. 아마도 저 아저씨 역시 권태로운 삶 속에서도 주말 술 약속 하나가 잡힌 게 아닐까. 즐겁게 만날 누군가가 아니라면 굳이 몸 키울 일도 없다. 난 커뮤니티 대표답게 독서도 글쓰기도 운동도 다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믿고 산다. 요즘 나의 하루는 단순하다. 아침에 카페에서 비비적거리다가 대충 껴입고 아파트 헬스장에 간다. 매번 오늘 운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러고는 다시 쇠를 등허리에 얹고서는 열심히 오르내린다. 과거에는 그게 다 나의 루틴, 나의 고독, 나의 정신이라는 말로 생각했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전적으로 주말에 보게 될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30대에 비해 약속이 현저하게 줄어든 독거인 박민진은 새벽의 유혹에 약하다. 라면과 삼겹살. 커피와 저당 아이스크림. 그렇게 약해진 내가 축척해 온 열량이 다 복부와 허벅지로 가고 있다. 배가 나오면 할복하겠다는 운동의 참맛 선언은 깨어지고 있다. 새벽의 고독이 나를 무너뜨렸다. 과거에는 약속이 잡혀 고깃집에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어도 과식을 하지 않았다. 혹시 누가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고 하지 않을까. 혹시 저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하면서 긴장하곤 했다. 헬스장을 가도 늘 페어가 있어 합을 맞췄고, 멋지게 몸을 만들어서 나갈 약속의 장소가 있었다. 요즘은 어떤가. 운동과 관계가 분리됐다. 난 혼자 운동을 가서 칼로리를 소모해도 멋지게 옷을 입고 나갈 자리가 없다. 그러니 옷도 사질 않고, 씻지도 않고 동네를 활보한다. 카페에 앉으면 동네 아이 엄마들이 저 동네 백수는 대체 뭘 하길래 커피를 쉬지도 않고 시키는지 궁금해한다.
어제 새벽에는 과거 서울에서 긴 시간 독서모임을 함께했던 동갑내기 성준님에게 카톡이 왔다. 외로움이 절절한 메시지였다. 불안한 미래, 피앙새는 어디에! 난 기죽지 말라고, 패배를 인정하자고 얘기했다. 우린 그 시장에서 용도 폐기가 되었다고, 그거 인정하면 속이 시원하다고. 주류의 시장에서 탈락한 자는 체념을 몸에 익혀야 한다고. 성준님은 탈락하지 않았다고 강변했고, 나는 성준님에게 말하는 척하면서 스스로 되뇌었다. 탈락했지만 괜찮아. 다시 관계가 다시 풍성해질 리 없어도, 서로 위무하며 살면 된다고. 앞으로 지독히 더 외로워질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 수 있어. 어떻게 그러냐고 묻는 성준님에게 난 할 말이 없어서 책을 읽자고 했다. 속으로는 그게 계획대로 되었다면 내가 새벽에 라면 물을 올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난 카톡 메시지를 쉬지 않았다. 성준님은 대체 왜 이 귀중한 시간에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난 도리질 치고 속으로 책이 시시해지면 그땐 정말 죽을 때가 다 된 것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요즘 나는 고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작은 관계의 여력이 있다면 기꺼이 다정해지자고 다짐한다. 성난 노인으로 늙어가기 싫으니까. 냉소는 아무나 다 할 수 있지만, 다정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얼마 없을 관계의 기회에서 기꺼이 다정해질 수 있는 담대함을 갖고자 한다. 용기를 단련하는 것이 헬스장 가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걸 몸소 체감하고 있다. 애들이 동물원에서 원숭이들한테 돌을 던지고 애견센터 진열장을 주먹으로 쳐서 강아지들을 놀라게 하는 건, 사실은 대화를 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반응이 없으니까 아이들은 제 딴에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나의 외침이 누군가에게 닿고, 나의 글이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읊어진다는 믿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세상에 사실 없는 것 같다. 고독은 그걸 상기시키는데 의미가 있다. 우리 어머니의 과도한 카톡 사진 업로드와 내 브런치의 구질구질함, 성준님의 카톡 메시지 모두 당신의 눈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외침에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