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 수익은 글에서 나지 않아요. 인세도 여전히 정산이 되고, 가끔 기고를 해서 돈을 받지만 불분명하죠. 이제 명백하게 글은 어느새 제 직업이 아닌 취미로 제자리를 찾았어요. 섭섭하면서도 언감생심을 비껴가니 마음이 편하기도 해요. 지난달부터 저는 글쓰기 모임 필친들과 30일 일일 글쓰기 챌린지에 참여했어요. 과거 코로나 시기에 답답할 때 하던 프로젝트였죠.
방구석에 갇힌 이들과 함께 힘을 내려고 했던 챌린지를 날 좋은 가을날에 시작한 셈입니다. 글이 내게 뭔지 한 번 테스트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깃발을 꽂은 터라 허투루 할 수 없었어요.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자정즈음 할리스에 가서 스스로 옥죄어 글을 쏟아냈습니다. 함께 해주신 씀 가족 여러분에게 감사해요. 여러분이 없었다면 한 달을 글과 함께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번 챌린지를 통해 매일 글쓰기를 하며 사뭇 글쓰기를 재정의할 수 있었어요. 직업란에서 작가를 빼고 다시 비작가의 삶으로 돌아왔거든요. 아느 한날은 이런 주제도 올려봤죠. '내게 글쓰기는 무엇인가.'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을 가능한가' 캄캄한 자정에 글을 쓰다 보니 직장인 시절 생각도 나서 좋더군요. 그땐 대단한 작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는 글쓰기를 저를 위무하는 용도로 사용했지, 타인을 이해하는데 쓰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건 제가 생각한 작가관이 아니었죠. 그래서 취미는 글쓰기 정도로 물러서기로 했습니다.
제게 글은 탐내지 말아야 할 대상을 탐욕하는 것이 허용 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을 실감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탐욕이죠. 글로 과거와 미화를 넘나들며 글에 대한 답답함이 많이 해소가 되었어요. 가을 단풍을 보지 않아도 시원했어요. 어쩔 때는 미숙하게도 순간의 감정에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글을 썼어요. 그것도 과거에 저와 함께한 이들을 향해서요. 때로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천박한 욕망을 드러냈어요. 그 부끄러움이 누군가에게 가닿지 않도록 안전하게 허구로 쓰기도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장난으로 덮어버리는 식으로 말이죠. 허구는 일류 건축가의 안전가옥처럼 빛과 균열을 적절히 안배합니다.
요사이 새벽에 대부분의 글을 썼어요. 인적이 드문 곳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니 무서운 일을 저지르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솟아나더군요.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귀여운 척을 하고 재치 있는 웃음을 추구하며 읽은 이에게 사랑과 애정을 바랐습니다. 글은 무뚝뚝하고 침울한 저를 아이돌 그룹 멤버로 만드나 봐요. 그리고 글은 배설하는 화장실이 되기도 해요. 글이 취미가 될 때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나 봐요. 이런 제가 좋아서 저와 만난 사람도 있었는데, 막상 글 외에는 무덤덤하고 냉소에 가까운 저를 보며 실망하기도 했죠. 저는 허구와 함께하는 글 속이 더 나은 사람이 아닐까요.
프랑스에 살던 시절에 들은 말인데 그 애들은 '르상티망'이라는 말을 자주 쓰더라고요. 원한을 뜻하는데, 질투,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적의를 표출하는 마음을 경계하지만, 이를 통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효용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저를 긍정하는 수단으로 밖으로 소음이 새어나가지 않는 원한을 품었습니다. 제안의 메아리가 새벽의 끝에 잦아들어서 다행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저의 일상은 최근 조용하다 못해 중성화된 제 고양이 율이와 같은 것입니다. 율이는 들끓는 몸에 당황해서 울부짖었지만 중성화 이후로는 평원을 거니는 수사자처럼 느긋해요. 그런데 매일 글을 써 내려가면서 제 속에 용도 폐기된 욕망을 다시 가동할 수 있었어요. 구구절절한 글은 저를 은근히 부추겨서 헐떡이게 했습니다. 그건 물론 대부분이 거짓의 역량이지만 평안하게 하루를 보내는데 제격이었습니다. 퍽퍽하던 차에 윤활제가 필요했는데 이번 챌린지가 그 역할을 해줬어요.
저는 소설을 읽을 때 뜻밖의 죽음이, 사고가, 살인이 나오면 열광합니다. 삶에는 그런 사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허구니까 맘 놓고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허다한 그알 팬들처럼요. 저의 자족하는 정체된 일상은 허구의 소설과 허구의 글쓰기가 필요해요. 제게 글은 세상에 하등 기여하는 바가 없는 짓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제게 꼭 필요한 수단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저는 사랑의 파동과 안전한 욕망을 원하는 것 같아요. 글은 그런 의미에서 저를 들끓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밖으로 표출하기 뭐 한 감정들을 폐수 처리한 셈이죠.
글 속에서 저는 금기와 제도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규정하거나 범주화하는 것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솔직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세계를 구성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희망도 절망도 없는 세계에서 부디 저는 거칠게 긁어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혼란 안에서 빚어진 활력이 글을 더 어지럽게 했으면 해요. 거짓과 폭력을 일삼더라도 정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죠. 민낯으로 글을 써 내려가면서 생을 사랑하는데 기필코 성공하고 싶어요.
이번 30일간 제가 쓴 글의 행각은 돈이 되지도 않고 삶에 실용적이지도 않은 글쓰기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 질문에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 마지막 글이 혼란스럽지만 그 무의미한 잡음이 제가 추구하는 글이기도 하니까요.
2019년이 떠올라요. 그때도 새해 이쯤이었죠. 이메일함을 열어보니 출판사 북스토리에서 제 글을 출판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인생은 참으로 예측불허라, 발령지인 강원도 원주에서 홀로 야근하다가 춥고 외로워서 밤마다 끄적끄적 정말 일기처럼 썼던 글들이 결국에는 저를 작가로 만들었고, 과감하게 퇴직하게끔 부추겼어요. 작가가 되려고 퇴직해 놓고는 엉뚱하게 살고 있으니 참 삶이 요사스러워요. 긍정적인 의미로도, 그리고 씁쓸한 의미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