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는 시간

by 박민진

늘 하고 있다. 뭐든 한다. 멍하니 있지를 못한다. 어떻게든 공백 없이 채워 넣으려고 애쓴다. 바쁜 현대사회라서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바쁜 게 미덕이요 한갓진 것은 불안을 촉발하니까. 요 며칠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는 아이고 죽겠네 중얼거리며 잠들었다. 1851년 미국인 제임스 킹은 드럼 세탁기를 발명하고 나서 주부들의 노동 시간은 혁신적으로 줄어들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킹의 단언과 달리 세탁기 소리는 멈출 세를 몰랐다. 열흘에 한 번 빨던 걸 이제 하루에 한 번씩 돌려대니 가사 노동은 전혀 줄지 않은 것이다. 이 글도 세탁기 소리와 함께 적고 있다.


나의 바쁨 강박을 어떤 정신적인 문제, 양육 환경에서의 영향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려는 전 여자 친구의 시도에 난 미간을 찌푸리면서 강렬하게 저항했다. 그 강박과 익숙해져서 살고 있는데 억지로 떼어놓으려는 것 같아 겁이 났다. 심리적 요술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써달라고 했다. 인식은 팔공산 바위 같다. 기질은 그 밑을 떠받치는 반석과 같다. 애쓰고 싶지 않다. 그저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나의 궤적을 글로 옮겨보는 것 정도가 기쁜 일이다. 개선보다는 당위를 원한다.


사랑하지 않고 산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내 첫 책 제목이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북스토리)이다. 처음으로 낸 공저 이름이 내 삶의 쉼표(문학동네)다. 고독이 어쩌고 하면서 폼 잡는 글도 참 많이 썼다. 혼자가 단단해야 어쩌고 저쩌고. 올해 마흔이 되어 지난 20년을 돌아보니 연애 중이 아니었던 때가 거의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틈이 날라치면 난 전화통을 붙들었다. 오늘 저녁 할까요. 차 살까요. 영화 볼까요. 책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말은 달리해도 외롭다고 만나 달라는 청이었다. 거절당해도 끄떡없었다. 세상에 외로운 사람은 많은 법이니까. 쉼표를 찍고 기꺼이 외로워도 기꺼웠을 시간에 참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


처음 글을 적을 때는 공백 없는 사랑을 했다고 적었다. 꼭 그렇지는 않다는데 생각이 미쳐 한 문단을 다 지우고 다시 고쳐 썼다. 난 공백 없이 사람을 만났지 사랑을 한 것은 아닐지도 몰라. 그 점이 불안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늘 외로움은 생산력이 좋다고 추천했는데, 실은 공백을 채우느라 사람을 만났다는 기분이 든다. 뭐든 열심히 하는 나는 외로움을 통증으로 여기고 곁에 사람을 불러들였다. 조금만 괴로워지면 고백 공격을 감행했다. 늘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글에다가는 외롭다고 적었다. 사실 순 뻥이었다. 외롭지 않은 중에 외로움을 불러들이는 곡소리를 낸 거다. 부끄러운 짓이다.


20대 때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호감을 가진 친구와 사귈 때도 있었다. 30이 넘어서는 연애를 친구와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전에 연애했던 사람들을 헤어지고 나서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좋은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후회가 덜할 테니까. 사랑하지 않는 시간을 좀 더 많이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나았다고 글로 적을 수 있을까.


나는 한때 미술관 큐레이터를 하는 친구와 만나곤 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아는 화가들의 갤러리에 나를 초대했다. 삼성역 근처에 작업실을 둔 친구를 찾아갔던 여름이 기억난다.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그 갤러리에 걸린 작품을 보면서 위대함이란,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이란 이런 것임을 깨달았다. 그림 속 물결의 흐름은 유연하게, 마치 몸의 연장인 양, 팔의 일부인 양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걸 바라보면서 이따금 눈을 감고 그림의 물성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작가의 더러운 흰색 티셔츠와 헐렁한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 가냘픈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와 그림 속에 펼쳐져 있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의 가슴을 오르내리는 호흡에 맞춰 내 숨도 빨라졌다 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꿈이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환히 밝아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 내밀하고 황홀한 느낌에 취해 나는 겨우 몇 마디만 나눠봤던 그 친구를 거의 한 달 내내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와 함께한 저녁 술자리에서 난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마지막 택시를 잡던 학동 네거리에서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의 인스타그램을 뒤지고 새벽 내내 그가 유학시절 거닐던 동네 사진을 낱낱이 찾아보기도 했었다. 나를 경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 순간적인 도취? 난 그걸 미감, 아름다움이 내게 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황홀함에 비견될만한 뭔가를 찾기 위해 난 많은 것을 챙겨 보며 살아왔다. 책과 영화 그리고 전시회의 몇몇 순간들을 쫓으며 몸을 뒤척였다. 사랑하지 않는 순간을 잠시도 견디지 못해 허둥댔다.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능력은 내 평범한 삶에 빛을 비추었다. 난 그 아름다움을 잘 찾아내는데 도사가 되었다. 며칠 전 결혼을 한다며 고기를 대접한 친구가 말하기를 사람은 거의 다 비슷하다. 내가 잘 맞추면 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동의할 수 없었다. 다 맞는 얘기였지만, 그가 말하는 비슷함에 묶인 인간 군상은 내게 무채색이었다. 무색무취의 평범한 인간들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가. 고작 결혼하기 괜찮은 조건으로 수렴되는 존재. 개별자가 아니라 참고 살면 다 맞춰지는 보편의 덩어리. 하지만 개별성은 위험도 내포한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그 유별남이 그를 싫어지게 할 수도 있다. 보편은 거부하기 힘든 안정감이니까. 난 비슷하지 않은 걸 찾아내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