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덧창을 열었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밖에는 가로등이 아직 켜져 있다. 길에서 한 남자가 출근길에 나선 참이다. 커피 하나를 손에 쥐고 백팩을 메고 자색 우비를 입고 열심히 걷는다. 걸어 다니는 고구마 같다. 굳이 왜 이 날씨에 커피를? 어제 걸어가다 본 GS편의점 커피 2백 원 이벤트가 떠올랐다. 검소하시네. 길 건너편 남자는 비를 피하기 위해 상가 벽에 붙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출근 전 해피타임이리라. 시동을 건 차가 헤드라이트를 비추고, 빗물이 차를 두드린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기상청은 그런 얘기가 없었다.
나는 창밖 내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길 건너편 공사장에 자리한 무성한 덤불을 구경하고, 저 멀리 있는 아파트 속 꾸물한 형체를 보면서 상상하기를 즐긴다. 챙가 챙가~ 옆집에서 소리가 난다. 지난가을 초입에 한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는데, 그들은 매번 새벽같이 일어나서 음악을 켜고 출근 준비를 한다. 그들이 틀어놓은 음악과 목소리가 내게는 소음이기보다는 사람 사는 맛이 난다. 나는 눈을 감고 그들의 분주함을 들으면서 아침잠을 즐기곤 했다.
나와 구조가 같은 집에서 분주하게 움직일 그들이 떠오른다. 주방에서는 간단한 계란 요리를 할 것이고, 여자는 아마도 샤워실에서 머리 말리기에 바쁘리라. 며칠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들은 내가 올라타자 미소를 감추기 바빴다. 그들 사이의 고유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21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길고 더뎠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엿들어서 미안해요. 최근에서야 우연히 그들이 경찰 부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최근 책에서 본 통계에 따르면 미국 프로야구에서 구단에 드래프트 된 선수 중에 한 번이라도 메이저리그를 밟아본 선수는 7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이너리거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는 추신수와 박찬호가 하도 많이 떠들어대서 잘 알고 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을 줄 알았지만, 실은 치킨을 주더란다. 그들은 마치 치킨을 먹는 것이 흑인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듯이 군다. 치킨이 영양적으로 부족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눈물겨운 음식인가. 갸웃. 과거 MBC 다큐멘터리에서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에서 분전하며 점심을 치킨으로 때웠다고 했다. 그는 오열했고, 난 군침이 돌았다.
나의 눈물 젖은 빵은 군대에서 매일 사 먹은 1,800원짜리 밥이다. 21살 소위 월급은 실수령액 160이었고, 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위해 없는 야근을 만들고 구내식당 밥으로 때우면서 20대 초반을 버텨나갔다. 당시는 궁상맞아도 꽤 행복했던 것 같다. 주말마다 중고 모닝을 타고 용인 죽전까지 내달렸다. 모으고 모은 돈을 여자친구를 위해 다 썼다. 나와 4년을 함께한 소현이는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준다는 의미를 알려준 착한 친구였다. 아까울 게 없었다.
근무 시간에 찾아놓은 죽전 맛집들을 찾아가며 밥을 사 먹었다. 너무 돈이 부족해서 그 당시 유행하던 티몬이나 위메프에서 리뷰를 달아주는 조건으로 싸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주말마다 참 많이 걸었다. 소현이 덕에 성남과 분당, 용인 일대에서 잘 놀았다. 내가 돈에 쪼들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늠름하게 대했으나, 가는 곳마다 쿠폰에 할인 이벤트가 끼어 있는 곳이었다. 소현이는 세심한 사람이라서 무리한 데이트 코스에도 잘 따라줬던 것 같다. 소현이 덕에 성남과 분당 일대가 내 손바닥처럼 환하다.
우리 둘 다 연애시대라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감우성과 손예진이 나왔던 드라마였다. 남자 주인공 이름이 공교롭게도 이동진이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드라마 종국에 가면 다시 재혼을 한다. 이혼 사유가 아이의 유산과 그에 따른 상처였던 만큼 상처의 회복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다. 촬영지가 대부분 분당 일대여서 우리 단골집이 드라마에 자주 나왔던 던컨도너츠 분당파크뷰점이었다. 아침마다 산책을 갔던 좋은 기억이다. 소현이가 이사할 때도 난 엄청나게 고생했다. 짐을 옮기고 먹었던 동네 훠궈가 기억난다.
소현이 자취방에서 주말을 보내고 빨간색 시체버스를 타고 서울 국방부를 출근했다. 육군 대령 조 과장 밑에서 고생을 했다. 그는 프로페셔널했고, 나는 어리숙한 애송이였다. 그래도 좋았다. 퇴근하면 한남동에서 만나 놀다가 들어가기도 했고, 판교에서 만나 현대백화점에서 영화를 봤다. 당시 판교 근처 안랩에서 일하던 소현이는 업무 스트레스가 심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난 꿋꿋하게 그걸 못 들은 척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우린 일종의 결혼 생활을 한셈이었다.
난 가끔 메이저리그로 가지 못한 93퍼센트의 삶을 생각한다.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박찬호와 추신수 말고, 그들 뒤로 보이던 무명 선수들의 삶은 어떨까. 그들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자기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경기에 출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은퇴한 후에는 코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거나 다른 일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래 목표로 했던 메이저리거보다 더 소중한 뭔가를 얻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디선가 잘 살고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남 보기에는 보잘것없을지언정 평생을 들여 이룬 성취가 놓여있을 것이다. 나처럼 뭔가를 좋아해서 평생 생각도 안 하던 동네 카페 구석 귀퉁이 앉아서 뭔가를 적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참 신비롭다. 그게 그렇게 위안이 될 수 없다. 책상 위 작은 스탠드만 켜뒀다. 동그란 불빛 아래 글이 잘 나온다. 새로 바꾼 키보드가 조약돌 소리를 낸다. 좀 전의 우울하던 기분이 키보드 소리와 함께 다독여졌다. 글쓰기가 내게 프로작이자 타이레놀이다.
지나간 시간은 수많은 회한을 불러일으키고, 그건 글의 좋은 재료가 된다. 소현이와 만나던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녀석과 향유한 공간 어쩌면 소현이와 함께 이루었을 미래 같은 것을 상상할 때 나의 묽어진 삶이 다시 단단해진다. 여러 가능성을 겸비한 삶이 본색을 드러낸다. 소현이는 술을 빨리 마시고, 나는 열심히 웃겼다. 소현이를 웃기기 위해 개그와 유머 소재를 써서 에버노트에 저장했다. 이십 대 후반 나는 공군 위탁교육 준비를 해야 했고, 일 년 후면 프랑스로 갈 생각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소현이가 내 성공과 자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사코 거부했다. 대신, 어차피 나이를 먹으면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막역한 예감이 있을 뿐이었다. 스무 살 초반에 만난 커플은 다 헤어지게 되어 있다. 대체는 가장 사랑한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 때에 맞는 사람이 올뿐이다. 소현이는 제때 나 말고 다른 사람과 맺어져 이상적인 가족의 사진에 담겼다. 당시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고, 목표로 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내며 잘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난 소현이 부모님이 운영하던 대전 은행동의 고깃집에서 일일 알바도 했다. 긴장한 채로 손님 고기도 잘라주고, 잘 먹는 듬직한 군인 남자 친구 흉내를 내려고 고기도 마구 집어 먹었다. 그리고 그 근처 소현이 부모님의 작은 집에서 하룻잠을 자고 왔다.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다. 난 가위질을 못해서 쩔쩔맸다. 결국 녹초가 되어 가게를 빠져나왔다. 가끔 가다 프로필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보이는 소현이의 카톡에는 눈부신 아이들이 있고, 또 가끔 보이는 소현이 부모님의 카톡에는 손주들이 있다. (대체 부모님은 왜 추가가 되었을까)
요즘 두문불출하고 책 읽고 일만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집이 더러웠다. 뭐 그게 어때서. 창밖을 지켜보다가 머리에 스쳐가는 어떤 생각. 세상이 내게 정신을 차리고 달리 살기를 요구한다고 믿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 이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주 조용한 집이 아닐 수 없다. 세상 목소리에 끌려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는다. 글에 뭔가 좀 더 적고 싶다.
우리는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하다는 느낌은 관계를 틀에 맞게 조여 맨다. 우리는 틀 없이 살 때 행복했었다. 우리 자신만의 삶, 우리 자신에게 속한 삶, 다른 이들과 상관없는 삶을 삶을 살 수 있을 때 완전했었다. 우리가 자유로울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