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젤스 셰어, The Angels' Share, 2012
가끔 면세주류 코너에서 위스키를 한 병씩 구입한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고 술에 관한 지식이 없다 보니 그럴듯한 술병을 집어 든다. 술은 부모님을 비롯해 친구, 선배 가릴 것 없이 좋아하니 몇 병씩 구입해놓고 좋은 날 선물하곤 한다. 보통 구입하는 제품은 스카치위스키인데 색이 이쁘고, 저렴해 선물용으로 제격이다. 가장 즐거운 순간은 내가 선물한 술을 직접 따라주고, 마시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이다. 술을 따라주는 행위와 잔을 부딪치는 것엔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빛깔이 있다. 그건 마치 독주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과 같아서 그 술이 방광을 따라 흘러 서울시의 상하수도를 넘어 태평양의 작은 섬까지 흘러가는 것을 상상하며 관계의 유려한 흐름을 느낀다. 위스키는 안주 없이 먹는 것이 더 멋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술병을 까고 나지막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사실 위스키가 가진 두터운 문화적 휘장이란 서구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양주라는 것이 결국 가장 비싼 술이라는 금딱지 효과가 더 크게 작용한다. 나도 양주를 선물했으니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고, 상대 역시 술 한 병쯤은 기분 좋게 받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단순히 술 한 병 아닌 술자리의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니 수많은 유럽 영화에서 술병을 들고 친구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 클리셰가 되지 않았을까. 굳이 같이 마시지 않더라도 위스키라는 것이 TV를 보면서 홀짝홀짝 거리기 좋아 쟁여두고 먹기도 좋다. 주스나 콜라를 섞어 먹어도 되고, 과일과 같이 먹어도 훌륭하다. 내가 술 좀 할 줄 알았다면 위스키 한 잔을 따라놓고 개폼 잡고 홀짝홀짝했을 텐데, 그게 안 되니 이렇게 선물용으로라도 상대의 귀중한 시간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엔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서는 한 청년이 한 시음회에서 위스키의 역사를 책으로 공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자리와 그 공간, 청년의 달뜬 얼굴에서 스코틀랜드가 가진 위스키 문화가 살짝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술 한 병의 즐거움에 대해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있고 청년은 자연스레 자신이 든 술잔의 진위를 궁금해한다. 위스키가 가진 역사적 사실과 증류 과정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경건한 태도들이 한데 모여 있는 따듯한 공간이다. 청년은 막 공부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홀짝이며 웃는다. 나는 그저 위스키를 브랜드랑 기껏해야 얼마짜리라고 떠드는 것이 다인데, 글라스고 달동네의 날건달들은 증류소의 제조공정에서부터 위스키의 향과 오크통의 특성으로 위스키의 종류를 맞춰대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프랑스인들은 대화 소재를 만들기 위해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신다. 독일인들 역시 비슷하게 맥주와 축구가 있다. 아마도 스코틀랜드의 고된 역사 속에서 위스키는 자신만의 치료제로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엔젤스 셰어>는 맨날 동네에서 싸움질만 해대던 전과자 청년의 갱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청년에게 문제는 망나니로 살던 과거와 달리 아내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여자 친구는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면 헤어질 각오 하라고 협박하지만, 전과자라는 편견과 그를 위협하는 양아치들 그리고 300시간이라는 사회봉사 시간과 경제적 문제들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전과자가 버티기 힘든 사회인 건 별반 다를 바 없다. 코너에 몰린 이 청년에게 배 나온 천사가 나타난다. 사람 좋은 사회봉사 감독관은 어둠에서 헤쳐 나오려는 이 청년에게 위스키의 즐거움을 알려주기로 한다. 청년에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취미거리를 주는 것이다. 이 감독관은 보관함에 술병을 모아놓고 한잔씩 즐기는 전형적인 중년의 아저씨인데, 힘든 노동 이후 집에 와서 즐기는 위스키 한 모금이 인생의 큰 낙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노동자의 정서에 익숙한 켄 로치다운 힐러의 등장이 아닐 수 없다.
아마 감독관의 눈에 청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태도에 있었나 보다. 항상 퍽퍽하고, 불안한 눈빛을 가진 이 소년가장에게 위스키가 가진 문화적 여유를 선물하는 모습은 의미심장했다. 주말에 위스키 시음회에 참석하고, 증류소에서 공부도 하면서 청년은 감독관의 의도대로 위스키를 인생의 취미로 만들어낸다. 거친 삶의 흔적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청년에게 위스키는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의 산물이 된 것만 같다. 위스키라는 숙성의 문화가 지닌 여유와 관대함이 모난 인생을 살아가는 청년의 마음을 평탄하게 다독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뛰어난 후각과 위스키 감별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청년은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공부하게 된다.
청년은 고민 끝에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수십억을 호가하는 몰트 밀 위스키를 '약간' 훔치기로 결심한다. 갱생 스토리를 원했던 관객들의 기대를 이렇게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니, 켄 로치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이런 선택은 영화가 결코 도둑질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만약 청년이 위스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뒷골목에서 칼이나 들고 전과자가 되어 교도소에서 썩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 엔젤스 셰어(angel’s share)는 위스키를 보관하는 오크통에서 자연 증발되는 분량을 뜻한다. 자연이 2%의 위스키를 천사의 몫으로 돌리는 것처럼, 감독 켄 로치는 술 몇 병으로 전과자가 훌륭한 가장이 될 수 있다면 충분히 나눠먹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평생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썩은 병폐를 강하게 비판하고, 자본의 분배를 그 누구보다 중요시했던 켄 로치는 위스키의 농담으로 자신이 가진 신념을 전시한다.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을 위해 영화판에서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 노감독은 약자를 향한 따듯한 시선이 그 누구도 불행에 몰아넣지 않고도 충분히 위스키처럼 풍요로울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위스키를 입에 머금고 그 유래를 유추하는 과정처럼, 사회가 정한 범죄와 약자의 틀마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능해야 함을 말하는 듯하다.
평생을 노동자의 쟁의와 약자를 위한 영화를 만들어왔던 노감독의 날카로운 시선도 변해만 간다. 비교적 최근작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켄 로치는 술이 분노의 발화로서 활용한 것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이걸 나이라는 것이 주는 관대함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크나큰 무력감이 주는 쇠락의 기운이라고 느끼는 분도 있을 거란 생각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술이란 게 여럿이서 나눠먹는 것이 더 맛이 나듯, 자본이라는 것도 결국 같은 이치로 작동한다는 삶의 이치다. 그깟 위스키 한 병 나눠먹는다고 아무도 불행하지 않음을 알기를.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야 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