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쇼코의 미소>, 최은영 저
타지에서의 책 읽기
낯선 곳 프랑스에 머무른 지 이제 2달이 넘어간다. 고작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짧은 기간 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외국 친구들과의 대화, 속속 출현하는 낯선 곳과의 예기치 않은 교류들이 매일 반복되었다. 평일엔 수업을 듣고, 주말엔 낯선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모르고 살던 세상에서 들뜬 공기를 흡입하고, 예기치 않은 온도 차를 극복하기 위한 분주한 몸짓을 하며 살았다.
신기한 건 시간이 어찌나 느리게 흐르던지, 행복함과 시간이 반비례일 수도 있음을 처음 느낀 셈이다. 그로 인해 10년 넘게 붙잡고 있던 블로그를 잊고 살았으며, 하루에 몇 번씩 보던 거울과 이별했다. 집에 돌아오면 씻고 침대로 들어가기 바빴으니까. 이런 와중에도 한국에 있던 때와 다르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독서다.
난 늦은 저녁에 소설을 읽었다. 하루 종일 낯선 것들과 옥신각신하느라 분주했던 머리를 녹이는데 소설만큼 좋은 도피처가 없었다. 그 무거운 와중에도 수화물 가방에 챙겨 온 소설이 ‘조너선 프랜즌’ <인생수정>과 ‘조이스 캐럴 오츠’ <폭스파이어>였다. 물론 ‘김애란’ 신작 <바깥은 여름>도 빠짐없이 챙겼다.
최근 일 년 간 난 거의 외국 문학과 인문서적에 푹 빠져 지냈다. 그건 한국 출판시장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베스트셀러를 쫓지 않으려고 해도 남들이 다 읽으면 얼추 따라가게 되는 건 있으니까. 또한 난 상대적으로 한국 소설에 대한 호감이 적었다. 어려서부터 거의 영미문학에 빠져 지냈으며, 늘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레이먼드 카버’,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이역만리 타지에선 한국의 삶을 그린, 한국어로 된, 한국 작가의 글을 무조건 찾아 읽게 되더라. 그건 구석탱이 아시안 마트에 가서 한국에서 잘 먹지도 않던 신라면을 가방 가득 사야 하는 그런 심정과 비슷하다. 물리적 거리감은 심정적 호소를 낳는다.
그네들의 글은 내 누추한 옷에 하나의 보호막을 씌워 주었다. 내가 어느 곳에 혼자 있던, 어느 곳에서 커피를 마시던 내가 소설에 접속한 순간만큼은 틈입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종이책이 없어 아이패드를 쓸 수밖에 없었지만, 난 어디에서나 이 회색 빛깔의 최첨단 기기를 펼쳐 들고 한국 소설을 읽는다. 이번 글은 그래서 내가 추천하는 한국 작가의 소설집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쇼코의 미소>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저
이 소설의 작가 ‘최은영’을 알게 된 건 내가 즐겨서 찾아보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였다. 아마도 15년 정도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읽었던 게 생각난다. <쇼코의 미소>라는 작품은 묘한 제목에서 나오는 울림 때문에 제일 먼저 내 손에 잡혔다. 이 소설을 서점 귀퉁이에서 쪼그려 앉아 모두 읽은 직후, 아 ‘최은영’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소설은 앞으로 무조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단편소설 한 작품을 읽고 그 소설집을 주저 없이 택한다는 건, SNS 사진첩을 보고 소개팅 여성이 이쁜 게 분명하다고 낙관하는 것만큼 못 미더울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쇼코의 미소>는 대단했다. 쇼코가 감정을 한껏 덜어 낸 얼굴로 집 앞마당에 서 있는 모습부터, 비 오는 아파트 단지에서 우선을 챙겨 온 할아버지의 남루한 모습까지 난 꼼꼼하게 기억한다. 난 이 소설을 읽은 지 2년이 넘어가지만, 최은영이 새겨 넣은 소설 속의 이미지는 오히려 더 생생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 프랑스에서 만나니 더 반갑구나.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쇼코와 다시 조우했다.
그녀가 수록한 7편의 소설과 한 주를 보냈다. 하루에 한 편씩 더도 덜도 무리하지 않고 그렇게 읽었다. 소설에 대해 보탤 말은 구구절절 쉼이 없을 것 같지만, 이 소설을 소개하는데 적절하게 느껴지는 ‘책머리에’를 일부 발췌해서 적어본다. 그녀라는 사람보다 이 소설집에 가까운 건 없으니까.
서른 살 여름, 종로 ‘반디 앤 루니스’ 한국소설 코너에 서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안 되는 걸까, 한참을 서서 움직이지 못하던 내 모습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삶은 멀리 있었고, 점점 더 멀어지는 중이었다.(중략) 십 대와 이십 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최은영의 소설집은 버릴 것이 없는 네스프레소 캡슐 세트처럼 느껴진다. 문장 하나하나 그 맛이 독특하고, 전체적으론 그 누구의 취향도 맞출 수 있는 쉬운 단문을 구사한다. 그건 최은영의 문학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그녀의 문장엔 무리한 보폭이 없는데, 말인즉슨 타인을 향한 사려가 담긴 언어의 조탁 과정이 문장을 부대낌 없게 한다. 자신이 내디딘 문장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우려, 혹시나 행여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 챙겨서 가고 말겠다는 조심성. 가령 수록작 중 하나인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의 경우 상처와 상처가 덧나는 생채기를 마주하는 소설이다. 군부독재 시절과 가난의 연속, 운동권 학생들의 투쟁과 같은 먼지 냄새나는 고루한 소재에도,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인물의 대사와 클리셰를 경계하는 화자의 생각들이 세련된 문학으로 보이게끔 한다. 상처 난 자의 궁여지책을 고육지책으로 만드는 식의 참혹한 설정에도 자꾸만 뒤로 돌아보며 버려진 자를 끌어당기는 이 소설의 주저함은 결코 <쇼코의 미소>와 다르지 않다. 이 소설에서 최은영은 이런 문장을 적는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내게 이 문장은 마치 최은영의 소설이 가진 태도를 향한 선언처럼 들렸다. 최은영은 등단 초기부터, “선천적으로 눈이나 위가 약한 사람이 있듯이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 앞에 겸손히 귀를 열고 싶다고 밝혀왔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작가라면 난 계속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문단은 부침과 기지개를 반복해왔다. 단적으로 계속되는 판매부수 감소와 신경숙의 표절 논란으로 거의 코너까지 몰려버렸다.(나도 거기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은 잠시뿐이다.) 한 간에서는 어느 누가 소설을 쓴단 말인가 하는 요절한 한탄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올해 한강 작가의 맨 부커 인터내셔널 수상 소식과 함께 김영하, 김애란, 권여선, 김중혁과 같은 중진 작가들의 약진으로 다시금 힘을 내고 있다. 난 여기에 신진 작가들의 등장에 대해 한마디 보태고 싶다. 최은영, 김금희, 조해진, 김이설이 그렇다. 난 그들의 소설을 이 먼 곳에서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느 누군가가 고전문학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에 대해 말할 때도 여전히 그들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시대의 공기를 되짚고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