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지랄발광 17세, The Edge Of Seventeen, 2016

by 박민진

지랄발광 17세, 끝까지 지켜보는 영화


지난 주말 본 <지랄발광 17세>는 전형적인 청춘 영화처럼 시작한다. 매일 오빠와 싸우고, 친구들에겐 왕따를 당하며, 하나뿐인 친구가 오빠와 사귄다고 절교해버리는 철없는 10대 소녀. 소녀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소년에게 SNS로 저질 고백을 일삼고, 담임교사에게 자살 위협을 하며 '내가 자살하면 니 탓!'이라고 공염불을 외치기도 한다. 이 정도라면 그녀는 남자 친구 혹은 적절한 멘토(선생님 정도?)를 만나 성장의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결말을 예상하고 보고 있자니 소녀의 서투름과 진상 짓거리가 시시했다. 왠지 모르게 귀엽기보다는 끔찍할 정도로 피곤했다. 마치 한국 영화 <파수꾼>에서 친구에게 비겁했던 내 과거 형상을 보고 며칠간 끙끙 앓았듯이, 이 소녀의 모습에서 자기연민에 빠져서 늘 우울했던 내 학창 시절을 본 것만 같았달까. 영화는 끝내 이 소년에게 성장 대신 화해를 선물한다. 이 풋풋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청춘영화는 도대체 뭘까. 소녀의 철드는 과정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녀가 성장이라는 카테고리 속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관객의 믿음을 배신하는 전개. 극적 반전으로 소녀를 개도하려는 것도 아니고, 독립영화 특유의 낯선 비극으로 휘몰아 작품을 거무튀튀하게 하지도 않는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미봉책도 없으며, 갑자기 나타난 멘토의 등장으로 말도 안 되는 반전을 주지도 않는다. 난 그저 이 영화의 미덕을 이렇게 보았다. 이런저런 일을 겪다가 문득 내 반복되는 지랄발광에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고, 문득 순한 미소를 지으며 걷게 되는 것이 이 시기의 절차라고. 난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소녀를 기다려줬던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고는 편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지난한 기다림은 지랄 같지만, 끝내 소녀를 지켜보는 시선을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방점이 있는 영화였다.

지랄발광 17세 The Edge of Seventeen

나 이영화를 보고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이언은 911 테러에 관해 이런 말을 한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시킬 순 없었을 것이다. (중략)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 도덕성의 시작이다. "

세상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상상력과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주는 상상력, 그 경계는 어디일까. 이언 매큐언의 단호한 이 인터뷰를 보면서 난 상상력의 힘을 생각했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곳을 배재한 생각이란 얼마나 비겁한 것인가. 예술적 창작과 문학의 위대함, 일상의 선한 낯빛 모두 상상력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소년의 지랄 같음을 유심히 지켜보며 뚱한 표정을 짓는 우디 헤럴슨(극 중 교사)의 표정이 영화의 기조를 말해준다.


그땐 그랬지라고 하기엔, 너무 먼...


최근 우연히 2주간 대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지랄발광 17세>를 본 이후였기에 내 기대감은 컸다. 실습과 현장견학을 동반한 수업의 커리큘럼 역시 꽤 흡족했다. 이 여유, 이 낭만 캠퍼스가 떠오르는 학생들의 열의까지 교육 분위기는 훈훈했다. 기본 40세 이상의 아재들과 함께하는 수업과는 다른 담백함이 좋았다. 약간 머뭇거리고, 조금은 달뜨기도 한 그들의 표정과 말투는 사랑스럽다. 이런 내 들뜬 맘과 다르게 4학년 취준생이 다수인 학생들은 진지한 태도로 수업에 임했다. 생계의 현장에 나가기 전 교두보를 얻기 위해 이 수업에 임하고 있을 것이리라. 그 반면 직장인들로 구성된 집단은 그들과 다르게 느슨한 나사를 감추지 못한 체 실실 쪼개고 있었다. 남들 일할 때 받는 교육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그런 생각에 콧노래가 나올 때쯤 난 영화에서 소녀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여유 만만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 시기가 지나면 전부 추억으로 남게 될 거라는 믿음. 그 반면 지금 아무리 좋은 소리를 늘어놔봤자 이 고약한 사회는 그들을 친히 반기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부담감.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그대들이여.


지랄발광 17세 The Edge of Seventeen


내가 그들과 하나의 동류이길 원하지만 그럴 수 없듯, 대학생들 역시 날 쳐다보는 눈빛에 약간의 불편함과 거리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도 사람들이란 게 며칠 같이 있다 보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며칠 후 회식과 함께 동반된 술자리에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계속 기다려왔던 자리이기에 벼르고 벼른 대화의 화두를 그대들에게 던져봤다. 요즘의 취업준비, 요즘의 연애, 요즘의 게임, 요즘의 패션, 요즘의 가수, 요즘의 영화, 요즘의 책, 요즘의 핫 플레이스까지. 그렇게 시작된 내 레퍼토리식 인터뷰에 그들은 단답형의 대답으로 일관했다. 내가 듣고 싶었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못해 초조해질 무렵, 오히려 내게 역으로 질문을 해대는 학생들이 하나 둘 보였다. 주로 돈과 차, 직업, 연봉, 아파트 등 현실 속에 삼투압 된 시시한 얘기들이었다. 우리 아재들이 만나면 늘 하는 얘기들을 왜 궁금해할까. 내심 내게 맞춰주려고 그러는구나 고맙고도 섭섭한 맘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심 어린 눈빛에서 이제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려는 그들의 자세를 보았다. 나도 돈을 벌면, 나도 직장이 생기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낙담이 6:4로 공존하는 태도였다. 어른들이 만든 이 구직난과 경제 침체 속에서 분투하여 무언가를 이루기를 바라는 맘에 난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대답해주었다. 내 비루하고 별 볼일 없는 일상과 직업에 관하여.


하긴 나도 그랬다. 도대체 돈을 벌면 얼마나 벌 것이며, 차를 사려면 얼마나 모아야 하는지 감조차 안 잡혔다. 분명 어렸을 적 내 서른은 아이 둘과 이쁜 아내, 근사한 차와 32평의 아파트였는데, 현실은 간신히 사람 구실 하며 사는 정도다. 오랜 고민 끝에 3포 세대에 동참한 건 비밀로 했다. 난 아무렇지 않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들 힘들게 고민하며 살더라. 그렇게 자위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도 배웠다. 행복은 상대적인 거라고 못난 내 친구들과 신세 한탄하며 재밌게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학생들의 질문엔 엄숙한 기운이 묻어 있어 목에 힘이 자꾸 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안철수 뺨치는 멘토가 되어주어야 할 것 같은 맘에 없는 소리도 좀 섞었다. 내 인생을 보편적 이상향에 가깝게 과장하고, 마음 한쪽이 시큰한 그런 얘기도 조금 보탰다. '어 이거 조금만 더 가면 꼰대 소리 나오겠는데' 싶을 때마다 농담으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평소 이런 생각 좀 많이 해둘걸 싶더라. 별 생각도 없이 출퇴근하고 놀다 보니 학생 시절의 진지한 고민들은 소거됐다. 난 그저 몸 키우고 재밌는 책 보는 게 인생의 다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날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을 견디기 힘들더라. 나이 좀 먹었다고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들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란 어쩐지 낯 뜨겁다.


지랄발광 17세 The Edge of Seventeen

난 요즘 몸과 건강을 위해 하루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다. 누군가 내 신조를 묻는다면 난 건강이라고 대답할 자세가 되어있다. 운동은 습관처럼 내 일과에 끼어들었고, 매일 몸무게를 재고 건강한 식단을 찾는다. 패스트푸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조금만 배가 불러도 자책한다. 어릴 땐 재능에 넘친 예술가와 천재적인 공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동료들을 선망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점점 건강이 계급으로 느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산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건강이 재능을 불러올 수는 있어도, 재능이 건강을 불러올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루키 답게 주저 어린 말이지만, 장기간의 집중과 노력을 유지하려면 건강밖에 길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말이다. 하루키는 매일 새벽마다 조깅을 하고, 두부와 생선 위주의 식사를 한다. 적정한 술, 규칙적인 글쓰기까지 하루키적 일상은 이제 심플 라이프로서 많은 이들의 이상향으로 자리 잡았다. 하루키 정도는 아니지만 난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스케일링받을 때, 건강검진 외에 병원은 나와 상관없는 장소다. 직장인들이 달고 산다는 두통, 어깨 결림, 숙취 같은 것들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내 옆자리 동료가 숙취에 고생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모니터만 보고 있을 때 영혼이 빠진 위로를 건넬 순 있어도 그걸 이해할 순 없다. 이따금 어머니가 오늘은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셔도 난 그저 두통약을 사서 드릴뿐, 진심 어린 위로를 보내지 못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걸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종종 몸이 아프다는 여자 친구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헤어졌다고 할 순 없어도 난 왠지 모르게 자주 잔병치레하는 그녀에게 동정심 없는 놈으로 낙인찍혀 차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픈 사람 옆에서 괴로운 표정 짓고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언 매큐언이 말하는 상상력이란 내겐 멀고 먼 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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