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이리언 3>, 데이비드 핀처 감독
에이리언 시리즈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는 단연 3편이 꼽힌다. 이 작품은 21세기 첫 번째 거장 데이비드 핀처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늘 시리즈 최악의 작품이라는 오명을 달고 다니지만, 가장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좋든 싫든 거론된 작품이다. 제작 스튜디오의 입김이 신인감독을 짓눌러 데이비드 핀처의 감독으로서의 자의식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시 데이비드 핀처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MTV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할리우드 매가폰을 잡았다. 하지만 에이리언 시리즈는 1편과 2편이 각각 제임스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에 의해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이 시리즈를 풋내기 뮤직비디오 감독이 이어간다는 것 자체가 많은 팬들의 우려를 불렀다. 제작사도 마찬가지였는지 스튜디오에 입김을 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신인 감독을 조종하려 했다. 특히 제작비 부분에서의 갈등은 상당했는지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과연 어떻게 영화를 완성시킬 수 있었는지 의하 할 정도로 잡음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현재까지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의 연출을 실수로 치부하고, 향후 발매된 DVD의 커멘터리에도 참여치 않았다.)
이 시리즈의 창시자인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격인 프로메테우스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난 다시 에이리언을 찾았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를 통해 여렴 풋이 기억하는 리플리의 섹시한 몸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 하루에 한 편씩 이 시리즈를 완독 했다. 꼼꼼하고 면밀하게 에이리언이 리플리의 삶에 천착한 광경을 감상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1편과 2편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보았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3편과 4편을 보다가 자꾸만 집중력이 흐려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1편은 에이리언의 등장을 최소화하고 우주선 내부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 결과 정체모를 공포를 대하는 인간의 형상이 에이리언 시리즈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기본적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과연 거장의 솜씨다웠다. 2편은 제임스 카메론 특유의 대량 사격전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이는 터미네이터와 프레테터로 총격전과 밀폐 공간에서의 융단폭격에 가장 유능한 솜씨를 뽐내는 제임스 카메론의 대표작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분이라면 1, 2편의 매끈한 만듦새에 실망할 이들은 없으리라.
이에 반해 3편과 4편은 역설적이게도 연출자의 야심이 더 분명하게 새겨진 작품이다. 1편과 2편의 큰 성공은 대중영화로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최대치를 의미한다. 이를 이어 잡은 신인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아마도 묵시록적 기독교 근본주의 , 여성 및 흑인이 포함된 젠더와 레이시즘, 섹슈얼리티의 문제, 더 나아가 묵시록의 잿빛 세상에 떨어진 인간 군상에 대한 면밀한 구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 거대 자본이 투입된 시리즈에서 이질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제작사의 분노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건 마치 트랜스포머 다음 시리즈를 만들라고 마이클 베이 감독을 불렀는데, 껍질을 까고 보니 돌연변이인 브라이언 싱어가 나타난 셈이다. 데뷔부터 데이비드 핀처는 뭔가 한 끗달랐다.
<에일리언 3>의 첫 시작을 살펴보자. 전편에서 에이리언을 피해 행성을 어렵사리 탈출한 세 사람이 있다. 주인공 리플리, 그녀를 지지했던 힉스 대위, 고립된 소녀 뉴트. 이 세 사람은 마치 핵가족처럼 일종의 헤피엔딩적 뉘앙스를 품고 영화의 장대한 마지막을 함께했다. 누가 제임스 카메론 아니랄까 봐 미국적 가치에 기반한 엔딩을 맞은 셈이다. 하지만 3편에 이르러 그들이 탄 탈출선은 원인 모를 화재로 폭발하고,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다. 허무하게도 힉스와 뉴트가 죽고, 이들과 함께했던 안드로이드 로봇만이 그 날의 사건을 일시적으로 진술할 뿐이다. 그녀가 깨어난 곳은 극악한 죄수들이 가득한 우주 교도소다. 흑인과 에이즈 환자, 여성을 섹스의 대상으로만 쳐다보는 괴물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클레멘스만이 그녀의 의지 대상이지만, 그마저도 대량 사상을 낸 의사이자 마약중독자이다. 믿을자가 사라지고 혼자가 된 리플리는 머리를 삭발해 섹슈얼리티를 삭제하고, 다시금 총을 들고 에이리언에 맞서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리플리는 행성에 불시착하기 전 초수면 상태에서 자신의 몸에 에이리언의 씨앗이 수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모선의 화재 역시 에일리언이 고의로 저지른 것임을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리플리는 섹스가 없이 괴물의 씨앗을 잉태했다. 이것은 모든 여성이 겪는 악몽이다. 자신이 원치 않은 존재를 임신한다는 것, 섹스 없는 강간의 흔적, 낙태마저 요원한 상황에서 여성을 늘 대상화하는 인간들과 섞여 지내야 하는 조직. 그녀는 마치 어두침침한 하수구에서 수직과 수평 이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에이리언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번식의 숙주, 남성성의 혐오지. 그녀가 어디로 도망치든 대상화된 존재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동정녀 마리아의 환생과 남근 없는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지나친 로우 앵글과 채도를 확연히 줄인 시각장치를 통해 이 출구 없는 묵시록의 세계를 형상화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쉬지 않는다. 리플리(오직 그녀만)를 구출하러 지구에서 보낸 구출선에는 기업의 관료와 백인 남성의 건강한 이미지가 있다. 안드로이드 로봇의 작위적 미소와 현대 테크놀로지를 대표하는 기술자의 이미지 역시 빠짐없이 배어있다. 리플리는 이들에게 자신이 품은 악을 선물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영원한 종말을 꿈꾸며 십자가 형상을 한 체 용광로를 향해 투신한다. 기계문명의 종말을 암시하는 잿빛의 세트에 끓어오르는 용광로의 이미지는 미래 암시의 전초이며, 그들을 구원한답시고 나타난 멀끔한 이들의 정체는 에이리언을 전쟁도구로 활용하려는 과거의 자들이다. 머리를 중처럼 밀어버린 12명의 죄수들은 끊임없이 절제하고 무릎 꿇어 구원을 빌었지만, 결국 에이리언 손에 죽는 제물이 된다. 누가 누구를 구원한단 말인가. 지금 이 행성은 구원의 대상자가 없다.
최근 한국에서는 낙태법 폐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페미니즘과 성 정체성, 소수자의 권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론 담론이 문학과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볼 수 있길 희망한다. 에이리언의 3편은 그 어떤 영화보다 지금 이 시대의 담론을 함축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지루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편하고 복잡한 대화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고픈 마음인 것을 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에이리언 3편을 감명 깊게 본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모두가 망작이라고 치부하는 지나간 시리즈 안에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선 인류 보편적 고민거리들이 함의되어 있고,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의 영속성을 생각할 때 몇 가지 예시에서 에이리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클래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리들리 스콧이 이 세계의 창조주로서 스스로를 치하하고, 새로운 작품을 떠올릴 수 있었던 자신감에는 분명 3편 역시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