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톤먼트> Atonement, 2007
지친 일과의 끝엔 침대 속 어둠이 자리한다. 하루에 새겨진 기억들을 꺼내놓고 퍼즐 맞추기에 여념 없다. 일종의 연역의 과정을 밟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꽤 괜찮았지?” 나의 하루는 스쳐 지나간 지 오래고, 내일은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날 덮칠 것이다. 오늘 남긴 생채기를 달래지 못한다면 편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유독 요즘 천장의 무게를 견디기 못하는 난 며칠간 읽은 책의 내용을 떠올린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들>는 최근 내 머릿속에 들어온 화두다. 인간들은 거짓된 위로, 대화를 가지고 탁한 눈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이 책엔 내가 미처 의식하지 않았던 스스로마저 쉽게 속이는 일상의 거짓말이 빼곡하다. 이 책의 저자 '이언 레슬리‘는 쉽게 단언한다. “누군가 큰 성공을 거뒀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꽤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증거”라고. 구체적으로 누군가 10억을 벌었다면 그 값어치에 맞는 거짓말 솜씨가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 짓궂은 발언의 진원에는 거짓말이 삶의 지천에 깔린 자갈과 다를 바 없다는 저자의 믿음이 있다. 마치 길리언 플린의 소설이자 동명의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바람피운 남편을 살인범으로 누명 씌우는 아내의 일기장(혹은 시나리오)처럼 섬뜩한 가정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10분 안에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거짓말들이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다. 고로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될 거란 말이다.
저자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악’과 동일시하는 개념으로 배우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거짓말’이라는 말의 어감을 바꿔야 그 불가피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거짓말이 인생의 필수불가결하다면, 잘 할 수 있는 쪽으로 교육방식을 바꿔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역사적 위인들의 수많은 예시와 유수의 철학책, 논리적 고증을 들이밀며 거짓말 없는 위대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사실 설득당하는 부분도 있고, 갸우뚱한 지점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으면서도, 그 지루함에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낮은 문턱으로 다가오는 책이라 마음이 갔다. 다 읽고 나서 책을 스르륵 들춰보니 내가 참 많은 문장에 밑줄을 쳤더라. 평소 거짓말을 자주하는 내게 타고난 듯 거짓말을 해대는 이 책 속의 수많은 거짓말쟁이들의 삶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만성적인 작화(confabulation) 능력은 말 그대로 본능이다. 그것을 죽이라고 교육받는 것은 윤리적 딜레마로 사람을 몰아간다. 능숙하게 상대를 속이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보다 더 나쁜 경우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조잡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상대를 배려한 거짓말을 뱉는 것이 아니라, 감추기 급급한 서툰 거짓말로 기분을 상하게 한다. 이건 스토리텔링에 대한 무지에 연관이 있다. 작화 능력을 개발시키지 못하는 교육제도는 질 낮은 거짓말쟁이들을 양산한다. 가령 내 예를 들어보면,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난 내 친구들에게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 마치 내 사연인 냥 말을 한다. 그것이 오는 길 운전하며 들었던 라디오 사연이든, 지난 주말 보았던 예능에서 보았던 유머든 내 식대로 바꿔 스토리텔링 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였는데 내가 그 친구와 공통적인 분모가 없다 보니 서먹하게 느껴지더라. 곧이어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에 밑천이 드러났고, 결국엔 말이 뚝뚝 끊어지는 순간이 지속됐다.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 녀석의 SNS 계정을 뒤져 녀석의 관심사 몇 가지를 알아냈다. 그리고 마치 내가 녀석과 통하는 게 많은 사람인 듯 연기를 했다. 녀석의 취미가 나와 동일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고, 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난 이것을 좋은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녀석은 내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 하지만 해될 것 없는 거짓이기에 죄책감도 없었다. 만약 이 거짓말을 친구에게 들켰으면 녀석은 꽤 기분이 상했으리라. 즉 상대를 배려한 거짓말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탄로 날 빈약한 구조라면, 의도치 않게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내 거짓말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전제는 거짓말이 발각되지 않고 상대에게 의도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 때 성립된다. 이러한 창작을 향한 본능이 남을 속이는 것을 넘어 예술의 영역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인류가 말하는 이상적인 그림이 아닐까. 인류가 과연 동물과 어떠한 거리감을 둘 수 있는가 묻는다면, 난 거짓말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본능은 이 책이 예술이라는 관념으로 정의내리는 가장 인간다운 특색이기도 하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로 ‘소문’을 꼽는다. 소문이 있어 인간의 언어가 정착되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뒷담화에는 정확한 정보만 유통되지 않는다. 과장된 정보가 위험을 강조하고, 때론 서툰 거짓말이 갈등을 촉발시켰을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 순간부터 거짓말을 하며 살았고, 그렇기에 진화의 범주에 거짓말을 하는 능력이 포함되어도 놀랄 것이 없다. 이는 언어가 인간 사고와 세계관을 규정한다는 ‘언어결정론’ 과 이어진다. 언어결정론이 늘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는 어쩌면 언어가 인간 사고를 가두고 있다고 말하는 뉘앙스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말은 언어가 가두는 사고의 유한성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자신이 본 것만 혹은 아는 것만 말해야 하는 진실의 영역은 언어의 확장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반면 거짓이라는 상상의 도구는 곧 개연성 있는 사고 확장의 구실이 된다.
거짓말에 대한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영화 <어톤먼트>이다. 영미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 중 한 명인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인 <속죄>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어톤먼트>의 훌륭한 점은 창작과 사람의 거짓말이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서사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날, 13살 소녀 브리오니는 창밖을 통해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옷을 벗어던지고 정원 분수대에 들어가는 언니 세실리아, 그런 세실리아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잡역부의 아들 로비. 창작을 삶의 낙으로 삼는 13살 소녀는 이 상황을 자신만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스스로 어른이라고 믿는 이 풋내기 소설가는 생각지 못한 야심으로 현실의 상황을 자기 맘대로 상상해버린다. 고적한 분수대와 옷 사이로 비치는 세실리아의 마른 몸, 로비의 거친 눈빛. 그 날 때마침 사촌 롤라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확신에 찬 브리오니는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해 누명을 씌운다. 브라오니는 첫사랑의 열병과 그로 인한 상처들, 달뜬 감정의 공기들을 모두 쓸어 담아 한 편의 범죄물을 완성했다. 지나친 각색과 드라마타이즈라는 열병이 빚어낸 숭고한 사랑의 파열은 곧 비극의 전초가 된다. 그리고 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제 어른이 된 소설가 브라오니는 그 날의 상황을 한 편의 소설로 집필한다.
문학과 현실을 혼동한 브리오니는 미성숙이라는 변명으론 덮지 못할 죄를 저지른다. 대지주의 딸, 대저택의 정원, 전쟁의 참상이 머릿속을 빙빙 돌아다니는 이 작품에서 모든 비극은 소녀의 오해부터 시작되었다. 소녀의 자기기만이 세계의 균질함을 파괴하고, 전쟁의 참상 속에서 연인을 비극으로 몰아넣을 때 소녀는 무엇을 했는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긴 속죄의 시간들은 인간의 윤리적 태도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되묻게 한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언니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사실을 왜곡했다. 로비가 사실은 폭력적인 악귀이고, 그는 이 대저택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원하는 믿음을 향해 모든 사실들을 굴절시켜 얻은 비극성. 이것은 문학의 윤택한 언덕이다. 현실왜곡과 자기연민이 가득 찬 중 2병의 열병과 만나 윤색된 소설은 일차원적인 적의로 표출된다. 소녀에겐 극적인 드라마를 위한 사실의 왜곡 없이는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었으리라.
그 거짓말로 인해 곧 형부가 되었을 로비는 전장에서 죽었고, 세실리아는 평생 가족과 이별한 체 외롭게 살아간다. 이것은 예술로서 행하는 창작이라는 예술과 인간이 저지르는 악한 거짓말이 얼마나 미세한 차이를 가지는지 보여주는 좋은 표본이다. 결국 브리오니는 끝내 두 사람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자, 이에 대한 기억을 문학의 범주에서 풀어 넣는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사려 깊게 생각하여 더 나은 거짓말을 적는다. 자신은 결국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문학적 구원이 가능할 수 있음에 그녀는 안도했다. 로비와 세실리아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이야기도 가능하다며.
원작인 <속죄>의 저자 이언 매큐언은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가디언’지에 이런 논평을 남긴다.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들의 생각과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시키진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떻게 느낄까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동정과 연민의 핵심이고, 도덕성의 시작이다.”
이언 매큐언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속죄라는 행위의 숭고함을 말했다. 하지만 내가 <어톤먼트>와 <타고난 거짓말쟁이들>를 같은 시기에 접하며 느낀 건 좀 달랐다. 인간에게 거짓말이라는 것이 떼어놓을 수 없는 해악이라면, 다른 이의 마음을 상상하고 같이 느끼며 보듬어 주는 거짓은 숭고함의 다른 이름이다. 종종 문학은 쓸모없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문학은 용도를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굳이 뼈를 발라내듯 문학의 효용을 끄집어내자면 그건 다른 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상상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로비가 전쟁 통에 목격했던 수많은 참상은 까마득한 절망을 연상케 한다. 이 책을 읽은 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그 악몽과 같은 <어톤먼트>의 전쟁신을 잊지 못한다. 긴 해안을 패닝으로 훑는 카메라는 그 속의 인간들의 참상을 그린다. 이는 이 작품이 허구에서 진실의 가루들을 손으로 쓸어내는 순간이다. 작은 소녀의 오해, 전쟁에서 죽은 남자, 그를 기다린 여자. 거짓말, 인지부조화, 속죄에 대한 개념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세실리아가 분수대에서 입은 야시시한 실루엣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