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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 시대의 스릴러

영화 <사이드 이펙트>, Side Effects, 2013

by 박민진

지금은 우울증의 시대


우울증이 이제 감기만큼이나 흔해빠진 시대가 되었다. 예전엔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같은 단어는 남이 들을세라 조심해서 쓰곤 했다. 요즘엔 이 두 가지를 패키지로 묶어 대화의 소재로 삼는다. 공황장애, 불안, 폐소공포증 역시 미디어를 통해 그 사례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되며 멀지만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엔 이런 신경증으로 인한 자살사건이 연예계에 다수 발생하면서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근사한 두 배우 덕분에 영화 초반은 꽤 로맨택히다. 루니 마라와 채닝 테이텀(소더버그 비공식 양아들)

과연 인생의 이면에는 어떠한 음습함이 있는 걸까. 비틀린 내면과 병적인 행동양태는 과거엔 문학이 주로 다루는 것이었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몇몇 소설들과 카프카의 모든 작품이 이런 신경증 문학의 원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빈번한 사용으로 인해 흔함이 도를 넘어섰다. 노랫말과 한낱 트위터 한 줄로 소비되는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마치 기분이 안 좋을 때를 대칭하는 용어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우울증이라는 얘기만 나오면 저마다 동의를 표하며 나도 죽고 싶었다고 하는 꼴이다. 우울증의 과소비로 인해 오히려 이 증상에 고통받는 이들이 감상에 빠진 나약한 이들로 취급받는 부작용까지 보인다. 이제 누군가 우울하다고 얘기해도 나 땐 그런 생각할 틈도 없었다는 소리와 배가 부르다느니 하는 꼰대 소리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바야흐로 신경증의 시대의 불안한 단면이라고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론 이런 현상이 <힐링캠프>, <무르팍 도사>를 시작으로 해서 종편에까지 무분별하게 퍼진 감성팔이 프로그램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모방을 도모하는 셀럽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살할 뻔했다며서 우울증의 극적 사례를 소개할 땐 자극적인 소재로 시청률 장사를 하는 방송사의 계산기가 고려된 것이다. 인생 스토리의 극적 전환은 연출이 택한 음악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미화된다. TV를 보던 나는 그래 나도 배고파서 우울증 걸리겠다 하며 리모컨을 집어던진다. SNS를 잘 살펴보면 자살과 우울증이 본격적으로 헤시태그에 덧붙기 시작했다. 난 실체는 없고, 이야기만 가득한 이 신경증의 시대가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7.jpg 이 영화는 주드로를 극심한 스트레스에 몰아 넣는다. 이러다 가발써야 되겠다. 그만 괴롭혀라.

우울증의 보편화는 우울증 약 역시 비타민제 먹는 것보다 흔해빠지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도 잘 자게 해 주고, 기분도 좋게 해준다니 어째 안 먹을 수 있을까. 섹스도 원활하고, 기분도 나아진다는데 우울증이 안 걸려도 먹고 싶을 판이다. 우리가 몇몇 우울증 브랜드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실제 많이들 먹기 때문이다. 영화 <사이드 이펙트>는 이 무분별한 신경증 시대의 약물 남용을 소재로 한 매끈한 스릴러다.


영화 <사이드 이펙트>, Side Effects, 2013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남편의 긴 옥바라지에 지쳤는지, 정작 남편의 출소 후 급격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에밀리(루니 마라)가 주인공이다. 남편이 무려 근육질 배우 채닝 테이텀인데, 그랑 자고 싶어 하는 미국 여자들이 연병장에 사열 종대로 세 바퀴 반은 넘을 텐데. 우리 에밀리는 극심한 우울증을 호소한다. 그녀의 집 인근 정신과 의사 뱅크스(대머리가 된 주드 로)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에게 우울증 약을 처방한다. 덥석 받아먹은 에밀리는 완전히 달라진 삶을 맛보게 된다. 갑자기 성욕이 돌아온 에밀리는 남편과 오래간만에 섹스를 하고, 남편은 약의 효능을 감탄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은 여기서부터다.


우울증 약에도 부작용이란 있는지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어느 날 에밀리에게 몽유병 증세가 나타난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요리를 하고, 남편이 잠든 침실을 분주하게 걸어 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섬뜩하다. 에밀리를 연기한 배우 '루니 마라' 얼굴 자체가 비쩍 골은 게 무섭게 생기기도 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에밀리는 약을 끊지 못한다. 왜냐하면 실보다 득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살아볼 맛이 나는데 잠이 들었을 때 발생하는 증상 때문에 이 약을 먹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제약사와 의사의 공생 관계를 영화의 복선으로 심어 넣는다. 돈을 받고 약을 처방하는 의사와 약을 팔기 위해서라면 부작용을 적극적으로 숨기려는 제약사의 암묵적 합의가 그것이다. 이런 복선은 늘 사회성 짙은 영화를 만들어왔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장기 중 하나다. 장르라는 컨벤션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그의 특기는 우울증이라는 사회현상과 그 현상을 통해 돈을 벌려는 권력과 자본의 흐름을 단순 구조화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6.jpg 소셜 네트워크에서 눈에 띄어, 밀레니엄 시리즈의 여주인공을 맡아 셰계적인 여배우가 된 루니 마라. 이 작품에서 정말 예쁘다.

의사 뱅크스는 의사로서 에밀리의 주장을 묵살하지 못한다. 환자가 효과를 본다는 데 이 약의 부작용을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동한 것이다. 그러던 중 에밀리가 남편을 몽유 상태에서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한다. 섹시 가이에 할리우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인 채닝 테이텀이 영화 중반 어이없게 살해당하자 나를 비롯한 관객들은 당황한다. '쟤 모야 왜 지금 죽어?' 그럼 이 살인은 누구의 책임일까? 에밀리는 몽유 상태라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해 무죄 판결을 받아낸다. 그렇다면 약을 처방해준 의사 잘못인가? 담당 의사는 직접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연구비를 지원받던 제약사와의 관계도 끊겨 버린다. 게다가 치명적으로 그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여론은 이구동성으로 의사의 잘못을 질타하고, 결국 주드 로의 얼마 안 남은 머리는 심히 걱정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이쯤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애청자의 위력을 보여주자. 이 사건을 통해 이득을 본 자가 범인일지니! 바로 보험금을 챙긴 에밀리가 범인일지다. 몸짱 채닝 테이텀도 죽이고, 주드 로의 머리까지 다 빠지게 했으니 에밀리 너는 죽어 마땅하다. 여성 관객들은 물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에밀리는 완전히 무죄다. 약이 죄지 내가 죄냐.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의사가 먹을랬단말야. 요러면 처벌할 수 없다. 영화에서 에밀리는 외모까지 가냘픈 데다가 분위기 있는 미인이라 모든 남자들의 보호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그래 난 에밀리 편이다.

친절한 정신과 의사 주드 로의 안내를 통해 하나씩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에밀리 말고도 이득을 본 자가 또 있다. 에밀리가 복용한 신경안정제를 만든 제약회사의 경쟁사가 그들이다. 제약사는 이 사건 직후 부작용이 없다는 광고 문구를 삽입한 신약을 시장에 내놓는다. 막대한 주가 이득과 판매고를 챙긴 이들은 과연 무고할까. 그렇다면 에밀리는 이들과 모종의 거래라도 맺은 건 아닐까? 뭐 영화를 본 자만 그 답을 알 것이다.


소더버그는 우울증을 비롯한 신경증에 기생충처럼 붙어서 이득을 보려는 집단(제약회사, 의사, 미디어, 투자사, 대중)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 역시 이 현상을 영화로 이용하여 장르영화(가장 상업적인 스릴러)로 완성하는 신묘한 기술을 보여준다.

실제 보편적으로 먹는 우울증 약의 과복용 및 중독성, 환각작용은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또한 이것이 무의식 중의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영화는 에밀리의 살인사건을 영화적으로 소비함과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연막을 친다. 사건을 쉽게 풀어내지 못하고 미궁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막장 스토리는 사실 내겐 흔하다.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이면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심지어 KBS <사랑과 전쟁>에서 비슷한 소재가 자주 등장했다. 영화에 종종 깔아주는 몇몇 복선들 역시 특정 범인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사실 캐서린 제타 존스(극 중 에밀리의 이전 담당 의사)가 영화의 중후반까지 주변 인물로 소비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스티븐 소더버그는 국면의 전환과 범죄의 출몰을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낭독하듯 읽어 내려간다. 소란 피우지 않고, 단서와 현실과의 부정교합을 성실하게 매워가며 완벽한 미스터리의 교과서를 따라간다. 좀 더 관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오버하지 않는 소더버그 식 스릴러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1.jpg 한때 헐리웃에서 가장 촉망받는 감독이자 최고의 흥행메이커였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제작자 스티븐 소더버그


최근 소더버그의 몰락을 말하는 블로그 포스팅과 기사를 몇 번 읽은 적 있다. 예전처럼 영화제에서 굵직한 상도 못 받고, 할리우드에서 그럭저럭 돈을 버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최근 영화인 <사이드 이펙트>를 비롯한 <매직 마이크>, <헤이와이어>, <쇼를 사랑한 남자>의 흥행 부진도 이와 관련이 있다.(참고로 난 세 영화를 모두 좋아한다.) <에린 브로코비치>, <오션스 일레븐>으로 오스카와 극장가를 휩쓸던 최고의 상업영화감독 소더버그의 전성기는 지나간 지 오래다. 소더버그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를 대신해 변명을 하자면, 소더버그는 11년에 벌써 일찍이 은퇴를 선언한 상태다. 그의 심리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의 친구 '맷 데이먼'에 의하면 대규모 자본에 휘둘려 예술로서의 가치가 훼손되어가는 영화판에 더 이상 머물기 싫다고 말했다고 한다.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에서부 터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아카데미와 흥행 감독의 칭호를 부여받았던 스티븐 소더버그는 영화 자체에 깊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 그런 그의 심리적 우울 상태가 영화에 적극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감독으로서의 위치와 본인이 하고픈 예술가로서의 애매한 위치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최근 <넷플릭스>를 위시한 TV시리즈 드라마와 저예산 영화 연출작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일종의 타협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는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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