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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 김봉현 저

by 박민진

낯선 땅에서 들려온 한국 힙합


프랑스에서 짧게 살면서 꽤 놀란 점이 한국 아이돌에 대한 어린 친구들의 관심이었다. 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15살 프랑스 소녀들이 BTS에 관해 얘기하는 걸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IPAD로 한글로 된 소설을 읽는 모습을 보고 무작정 카페 안에 들어와서 불쑥 말을 걸었다. 그저 내가 한국어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표하다니. 난 사실 아이돌의 음악을 제대로 알 지도 못하는 서른 두살의 아재다.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려 '강 다니엘'인지 하는 친구에 대한 칭찬도 해줬지만,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이들은 짧은 영어를 사용하여 손짓 발짓을 다 해서 자신들이 사랑하는 음악들을 소개했지만, 난 어색은 웃음을 띄고는 '오 굿.' '오브 코스, 아이 라이크 뎃' 이딴 추임새나 덧붙이며 진땀을 뺐다. 내가 프랑스까지 와서 한국 아이돌의 위엄에 대해 강의를 듣게 될 줄은 몰랐지.

소울 컴퍼니의 에이스에서 이제는 일리네어의 대표가 된 '더 콰이엇'

대화를 이어가던 중 주제는 한국 음악 전반으로 퍼졌다. 그들이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지는 음악은 한국의 힙합이었다. 힙합을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나는 그들과의 대화가 급속도로 흥미로워졌다. 우디고차일드의 비둘기 소리를 연신 흉내내고, Sik-K의 신보를 듣는 이 아이들. 개코와 로코, Jay Park의 회사를 속속들이 아는 디테일까지. 아마 한국에서도 힙합에 관심이 크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몇몇 뮤지션(Groovy room, Ugly Duck, Big One)에 관한 이야기까지 얘기는 번져나갔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아이폰에 들어있는 플레이리스트를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일리갈 일리갈" 아마도 불법 다운로드를 한 모양인데, 도대체 이 많은 한국음악을 어디서 다운로드하였냐고 묻고 싶지만 꾹 참는다. 왠지 모르게 아저씨의 잔소리로 비칠 수 있으니까 나는 "리갈 리갈" 하면서 내 멜론 플레이 리스트에서 수많은 힙합 곡들을 보여주었다. 서로 짧은 영어 탓에 뮤지션 이름과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여주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무언가를 같이 좋아한다는 건 언어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본의 한 여성과 영화관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이 당시에도 언어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끝내 좋아하는 영화 얘기가 나오자 제목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자극하는 대화가 가능했다. 내가 대부 시리즈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면, 그녀는 대부 2를 이야기했다. 그러면 나는 대부 1의 말론 브랜도의 등장에 관해 감탄하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는 알 파치노의 굵은 미소를 말하는 식이었다. 신기한 것이 대부 얘기는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그가 음악감독을 맡은 다른 영화들로 옮겨 붙어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이 낯선 땅의 이국 소녀들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난 행운으로 생각한다.

소울 컴퍼니에서 시작하여, 사회성 짙은 가사들을 자주 쓰는 래퍼 '제리 케이'

아마도 몇몇 아이돌이 힙합 뮤지션과 자웅을 겨루는 <쇼미더머니>의 효과가 유럽 대륙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리라. 또한 이제 오버와 언더, 아이돌과 뮤지션의 경계는 희미해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지코, 딘, 박재범을 아이돌 출신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가. 그들의 음악 수준은 논란을 뒤덮을 만큼 훌륭하니까. 어쩌면 난 한국 힙합을 우물 안의 것이라며 스스로 폄하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정서가 이 먼 프랑스 땅에서 먹히고 있다는 사실에 꽤 놀랐으니까.

컨트롤 비트 한국화에 기여한 래퍼 '스윙스'

힙합을 향한 오만과 편견


난 매일 힙합 음악을 듣는다. 늘 힙합 음악을 듣진 않지만, 그 어떤 음악보다 자주 듣는다. 매일 운동을 하는 나는 힙합을 자양분 삼아 거리를 걷고 뛰고, 그들의 비트와 함께 헬스장에서 몸을 단련한다. 힙합의 정서가 "내가 최고고 너는 나보다 한 수 아래야." 하는 메시지가 많기 때문인지 몸속에서 없던 힘이 나온다. 더 리드미컬하며 더 건방지게 도시의 길들을 통과한다. 사실 동적이고 힘이 필요할 때만 힙합을 듣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이기도 하는데, 힙합엔 슬프고 낡은 정서도 공존한다. 가사가 메인이 되는 장르 특성상 그 표현의 범위가 광의적이기 때문이다. 난 항상 참신한 힙합 음악들을 찾아 헤매고, 여전히 새롭게 속속 등장하는 신인류의 힙합들이 내 아이폰 플레이리스트에 올라온다.


힙합의 정서는 오해받는 지점이 있다. 그거 지 자랑만 하고, 돈지랄에 여자 얘기만 하는 게 무슨 음악이냐는 비난. 내가 최곤데 날 떠난 너는 후회할 거야 비치, 뭐 이런 내용이 주류다. 그게 아니면 내가 열라게 힘들었는데, 지금 돈을 열라 많이 벌어서 너 열라 열 받지 비치, 이것 역시 주 레퍼토리다. 반대로 바로 이런 ‘나 잘났어’ 정서 때문에 힙합을 사랑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본류에서는 마약 사고팔고(한국도 있는 것 같다), 술 진탕 마시고(이것 역시), 총 쏘고(이건 없겠지) 다 부시고 다니니까 내용 자체가 실제 발생하는 문제의식에 대한 분노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인종의 편견, 사회적 빈부 격차, 늘 발생하는 계급적 위력 등 신을 벗어난 실제 세계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가 있다. 물론 그들의 여성을 비하하는 수많은 가사가 날 불편하게 하지만(틈만 나면 헤어진 여자 친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그들에겐 삶의 자세로서 힙합을 체화한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타자에게 분노를 표출할만한 대체적 수단이 없다 보니, 욕구는 충만한데 SNS외에 해소 수단이 적다. 내 마음의 간지러움을 긁어줄 유사 목소리가 힙합인 것이다. 힙합의 랩이 분노를 표출하는 발화지가 되고, 래퍼들은 과거와 달리 영향력을 얻었다. 하지만 나 역시 지들끼리 디스하고 싸우지만 사회적 양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선 실망하기도 한다.(제리케이라는 다른 성격의 뮤지션이 있기는 하다.)

'양화' 앨범 한 장으로 언더의 대표 이미지가 된 VMC의 수장 '딥플로우'

사실 이런 오해는 장르를 이해하려는 조금의 노력이 있으면 풀린다.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한다는 지적에 컨트롤 대란을 한국에서까지 몸소 전파했던 스윙스의 대답을 들어보자. "발라드에서 맨날 사랑 얘기한다고 발라드라는 장르를 욕하지 않는다. 힙합의 기본 정서가 이런 것이다. 내가 잘났고, 난 돈 더 벌거고, 여자에게 매달리기 보단 한 탕 해서 더 잘 나가는 남자가 돼서 더 이쁜 여자를 만나겠다." 내가 이 친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마 힙합의 나 잘났어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뮤지션이 아닐까. 힙합이라는 삶의 태도엔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는 사실을 새롭고 독창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있다. 요즘 잘 나가는 힙합 뮤지션의 대부분은 이런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나 역시 20대 초반의 애송이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지 징징징”, “나 지금 잘 나가니까 너네 다 죽었어.” 이런 소리하면 듣기 싫다. 하지만 힙합에는 이 정서를 기반으로 가지를 친 수많은 카테고리들이 있다. 난 그걸 말하고 싶은 거다.


그 빠르고 쿵쿵거리는 비트 때문에 음악이 자아내는 감정이 단순하다는 것 역시 오해다. 힙합에도 분위기 있는 음악이 존재한다. 슬픈 목소리로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도, 인생의 실패감과 사랑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힙합은 분명히 존재한다. 힙합의 특성상 플로우와 라임이 있어 우리가 이별하면 떠올리는 발라드에 비하면 빠르고 리드미컬하게 느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힙합은 가사의 음악이다. 래퍼들은 가사를 통해 운율을 만들고, 라임은 그것을 잘 들리게 플로우를 만들어준다. 인생의 어둠과 음습함에 대해 얘기해도 힙합이 경박하게 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가사를 잘 들어보지 않고 쉽사리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가사에 빠져들면 래퍼만의 축약된 슬픔과 아픔이 있다. 랩이라는 특성상 모두 자기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보편적 정서를 건져 올리는 뮤지션이 분명히 한국에 무수하다. 마치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그리움이 그의 입을 통해 표출하기도 한다.

12인의 래퍼의 인터뷰,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

책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 김봉현 저


오늘 일요일 오전에 힙합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김봉현 음악평론가의 <밀리언 달러 힙합의 탄생>을 읽고 나서이다. 이 책엔 한국 힙합에 확고한 자기 영역이 있는 12명을 인터뷰하고 있다. 그 면면을 열거해보면 ‘다이나믹 듀오’를 제외하고 거의 다 들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끼, 더콰이엇, 빈지노, 팔로알토, 제리케이, 스윙스, 허클베리피, 산이, 딥플로우, JJK, 타이거 JK, MC메타. 개인적으로 JJK라는 래퍼는 음악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 이 책을 통해 알았고, 타이거 JK의 인터뷰는 기대한 것보다 내용이 지루해서 실망하기도 했다. 산이는 이 책에 들어갈만한 수준은 아닌데 라는 생각도 했고(진태형을 디스 해서 한국 힙합신에 입문했는데 버벌진트가 들어가야 하지 않나?), "이거 질문이 너무 비슷한 거 아냐." 싶기도 했다. 평론가 김봉현 씨의 생각을 토대로 한 날카로운 비평도 기대했지만, 그의 평가 속에는 격려와 찬사는 있지만 비판과 지적이 없어 아쉬웠다. 난 힙합 음악의 평론가에게도 힙합적인 거침없는 독설을 기대했나 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내가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힙합을 들어왔으면서도 잘 몰랐던 힙합이라는 본질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마이크 스웨거의 프리스타일 래퍼로 이름을 알렸던, 래퍼 허클베리 피

내가 귀에 이어폰을 꼽으며 멜론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킨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려 넣는다. 인터뷰이 12명 중 내 리스트에 들어가는 이들도 있고 아예 들어와 본 적 없거나, 들어왔다 지워진 이들도 있다. 그건 내가 그들의 비트, 가사의 내용, 목소리 등의 취향을 걸러낸 것이다. 그들의 가사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마냥 시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한국식 힙합이라는 변용된 형태는 개인의 삶이라는 작은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정서가 있다. 난 그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와 동질의 것에 감탄했고, 그걸 취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 책에 없는 다이나믹 듀오는 더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블로그에서 많이 언급됐다. 내가 이별에 슬퍼하고, 중고차를 사서 기뻐할 때, 그녀와 헤어진 후 집으로 걸어가는 긴 시간 동안에도 나와 함께 해주었다. 지금 어떤 논란, 비난, 예전과 같이 않다는 그런 얘기들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난 개의치 않는다. 내겐 내 학창시설과 20대를 그들의 음악과 함께했다. 다듀는 삶에 가장 밀접한 곡을 쓸 줄 알았고, 언제나 열심히 일을 해서 작품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마디로 도끼가 늘 말하는 힙합의 '허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힙합의 재벌화를 이끈 개천에서 난 용 '도끼'

난 이 책을 상당히 빠르게 그것도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내가 힙합이라는 영역에 대한 동경이 상당하는 것이다. 늘 힙합을 들으면서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풀어버리는 것에 감탄하곤 했다. 늘 직설적이며 매사에 거침없는 면이 내겐 복잡한 세상사의 카타르시스였다. 그들의 인터뷰 태도에도 그런 기조가 그대로 살아있어 글이 랩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들의 가사는 인생의 복잡한 측면을 몇 마디 랩으로 풀기 위해 노트를 더럽혔을 것이다. 타이거 JK은 메인스트림의 기수로, JJK는 신의 바깥 측면에서, 팔로알토는 기본부터 챙기는 꾸준함의 대명사로, 제리케이는 사회적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딥플로우는 자기만의 길이 무엇인지 끝없는 회의한 끝에 지금의 한국 힙합이 탄생한 것이다.

한국 힙합의 1세대 가리온의 'MC메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요즘 래퍼는 빈지노다. 내게 빈지노는 다른 이들과 한끝이 다른 사람이다. 개인적 아픔을 세련되고 유니크하게 표현한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힙합이라는 장르의 유연함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가사는 단순하지만 꼭 듣고 싶은 얘기만 해준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는 여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아도 슬픈 정서를 표출할 줄 알고, 굳이 화내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도와준다. 과거에는 버벌진트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네이버 1위 만들어달라고 떼쓰고 번복하다 음주운전하는 진태형 말고, 세련된 라임과 날카로운 통찰로 가사를 쓰는 철학적인 버벌진트를 좋아한다. 그는 가사의 딜리버리에 대해, 플로우의 한국적 형태에 대해, 학교 육교 거리던 진표 형의 랩에 변화를 가한 기술적 측면에서 성과를 이룬 사람이다. 최근엔 나플라의 음악을 듣는다. 그는 한국어에 많이 익숙한 것 같지도 않고, 어휘의 선택도 심히 단출하다. 하지만 난 그의 스타일이 좋다. 감정의 진폭이 적고, 에둘러 말하지도 않지만 삶을 향한 애착을 곡진하게 표현할 줄

안다. 툭툭 거리는 목소리에도 혼자서 보낸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 힙합은 <쇼미 더 머니>가 모든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BTS의 랩이 힙합일 수도 있다. 그것 모두 힙합이다. 매주 홍대 클럽에서 푸처핸섭을 하고, 힙합플레야를 매주 구독해야 진정한 힙잘알이 되는 건 아니다. 언더, 오버, 힙합 신과 아이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힙합이라는 삶의 태도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들 모두 흥미로운 신의 한 형태인 것이다. 지금 내 슬픈 마음에도 힙합 음악이 자리 잡고 있다. 내 외로움을 버텨나가는 수단으로써 힙합은 유효하다. 이제는 생활의 한 태도로서 힙합을 받아들인다. 힙합처럼 생각하고 힙합스럽게 표정을 짓고, 힙합스럽게 밥을 먹는 중이다. 너희가 힙합을 좀 아느냐?



사진 출처는 모두 출판사(김영사)에서 제공한 책 속에 삽입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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