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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유한성, 생의 유사성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2016

by 박민진

대학 졸업 후 군 입대를 앞두고 매일을 빈둥대던 때를 기억한다. 아침에 카페에 가 책을 좀 읽고, 저녁에 시원해지면 영화관을 들락거렸다.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새벽 밤이라는 게 그리도 유려한 지 처음 알았다. 아마도 그때부터 훌훌 털어내는 삶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생의 굴레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언제든 귀에 이어폰을 꼽고 거리로 나설 수 있는 상태를 염원했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2016

당시를 알바를 해서 모아두었던 은행의 잔고는 짧은 연애와 함께 금세 바닥이 났다. 그래서 시작한 게 집 근처 고깃집 일이었다.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려다 보니 편의점이나 배달일을 할 수 없었다. 여름이라 날도 더운 데, 손님이 늘 북적거리는 고급 식당에서 불판을 가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시급이 칠천 원, 요즘엔 최저시급 수준이지만 당시엔 꽤 쌘 알바였다. 불판을 갈고 고기를 자르며 남의 비위를 맞춘다는 게 내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주말에 스타벅스에서 육천 원짜리 캐러멜 마끼아또를 마시고, 오천 원짜리 케이크를 사 먹곤 했던 내 사치는 한 시간의 중노동에 그림의 떡이 되었다. 그래도 폭염에 지칠 때면 같이 일하는 형과 식당 뒤편, 개집 앞에서 세상 일에 대해 떠드는 게 삶의 낙이었다. 행복은 돈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공자님 말씀 따위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며 힐난하던 형의 꺼먼 얼굴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난 왜 아무것도 되지 않음에 절망했던가. 빈둥대고 방탕하며 무목적인 단독자의 삶을 즐기는 것에도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슬펐다.


당시엔 돈이 생기는 대로 영화관에 바쳤다. 다행히 그 당시가 한국영화의 부흥기라 가는 족족 지금도 평생 잊지 못할 작품들이 그득했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달콤한 인생>이 당시 본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봐도 성공률이 꽤 높았다. 당시에 본 영화들이 지금까지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쉬는 날엔 동네 카페에서 사장님이 추천해준 '무라카미 하루키', '미미 여사', '밀란 쿤데라', '폴 오스터'의 걸작들을 읽었다. 알바에 지칠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와 낡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어제 본 소설과 영화를 생각했다. 블로그에 적을 몇 가지 문장들을 떠올려보며 히죽히죽 웃었던가.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군대만 가면 되겠지 생각하며 마음 놓고 시간을 소모했다. 요즘 군 입대를 앞둔 친구들은 어떨라나. 나와 비슷하지 않으려나. 정말 뉴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학비와 취업난의 고민으로 삶을 견뎌나가고 있으려나. 아마도 아닐 것이다. 고된 상황에서도 그들 역시 그들 나름의 상상으로 그 시간을 빈둥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2016

이제 십 년이 흐른 지금 서른을 넘어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고 뭔가 달라졌을까. 난 시급 대신 월급을 받고, 생활은 풍족해졌지만 여전히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 틈틈이 이번 주 개봉 영화와 소설책을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지금은 저축을 조금 더 할 뿐이지 생활의 형태는 여전하다. 빈둥대는 것을 일상의 기치로 내세우고, 누군가 날 쓸모없는 어른으로 여길까 봐 조바심을 낸다. 어떤 삶의 목적도 애써 도리질 치고, 심야에 손 세차나 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그렇다 여전히 난 제자리를 걷는 중이다. 지금 이 허송세월을 떠나보낼 마음은 없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2016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2016


최근에 이런 내 느슨한 마음을 파고드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료타'는 데뷔작 이후 되는 일이 없다. 흥신소에서 일하며 사장을 등치고, 고등학생에 삥을 뜯는다. 헤어진 아내는 그의 무책임함이 아들에게 옮겨 붙을까 무서워 그를 피한다. 그녀는 말한다. 연애할 땐 료타의 무료함이 여유로워 좋았지만, 결혼이라는 삶의 한 복판에 서다 보니 어느새 비루함으로 바뀌어버렸다고. 경제적 능력이 결여된 남자에게 꿈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미래의 모습을 현재의 행복보다 중요시하는 현명한 아내는 료타에겐 버거운 존재다.

원제가 '바다보다 더 깊이'라고 하던데 그건 그 도달하지 못한 생의 깊이에 대한 회안의 마음이 아닐까. 한국 배급사에서 자체적으로 택한 제목인 <태풍이 지나가고>가 이 영화의 분위기와 걸맞는다. 그건 영화의 시각 자체가 태풍의 한가운데를 지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풍우가 지난 후 너절한 거리 풍경처럼 영화는 때 지난 우스갯소리로 가득하다. 태풍이 지나간 지 오래임에도 료타는 아내와 결합하지 못한다. 늙은 어머니가 노래하듯 방 세 칸짜리 집을 가진 가정을 강요해도 어쩔 수 없다. 때론 삶에서 꿈꿔도 변하는 것은 없다. 료타가 좋은 소설을 쓸 확률은 가히 희박하다. 화초나 얼음과자, 싸구려 시루떡과 주목받지 못한 삼류 소설과 같이 별다른 말을 보탤 필요가 없는 무의미 천지다.

료타는 말한다. "나도 이런 어른이 될 줄 몰랐다고. 자기 바람대로 어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는 책임감을 겁내지 않지만, 책임을 떠맡을 결단력이 없어 슬픈 사람이다. 애초에 감독의 전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 등장시킨 이혼한 가정의 무책임한 뮤지션 아버지처럼, 세상만사를 다 놓아버린 한량이라면 그저 웃어버릴 텐데. 료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에 삶 속에서 끈적거린다.


소설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저

소설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저


85세의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을 펴냈다. 현대 지성의 일선에서 늘 통렬한 문장을 뱉어내던 이 거장에게도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 소설에서 유언 같은 말들을 남겨 날 무거운 마음으로 이끌었다. 처음 소설을 읽어나갈 때, 쿤데라 정도의 대가라면 뭔가 대단한 경구들을 통해 내게 번뜩한 깨우침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생각 외로 좀 더 느슨하고, 번잡한 이 150페이지짜리 얇은 책은 대단치 않게 끝이난다. 극 중 등장하는 스탈린의 일화나 배꼽에 대한 성적 유희, 죽은 어머니와 대화, 쓸 데 없는 거짓말 등은 그의 전작들에서 늘 보던 광경이 아닌가.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것처럼 문어체의 대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 책의 제목대로 딱 무의미한 소리들의 반복이다. 쿤데라는 내게 별 것 아닌 것들이 삶의 불완전성을 설명하는 핵심이며, 이것을 긍정할 때 비로써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말을 건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들렸다. 정리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유언처럼 메아리칠 때, 소설은 주저 없이 종결을 맺는다.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거의 확실시되는)은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농담과 거짓말처럼 무의미라는 형태 없는 관념만이 메아리 친다. 탁자에 놓아버린 티라미수 케이크의 근사한 형태처럼 먹어버리면 사그라질 순간만이 앞에 놓여있다.


소설 속 배꼽에 대한 묘사가 재밌다. 이것만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뻘소리다. 각각의 개별성으로 대표되는 여성 관능의 상징이 과거엔 엉덩이, 가슴, 허벅지였다면 이제는 배꼽으로 옮겨왔다. 태아를 상징하는 배꼽은 그 어떤 개별성을 부정한다. 대량생산의 시대, 개개인의 형상이 희미해지는 상징으로서 배꼽은 성적 상징으로 소비된다. 밑위가 짧은 바지와 허리의 잘록함을 강조하는 크롭탑을 바라보는 쿤데라의 시선은 어떨까. 시선을 소비당한 젊은 여자는 이 늙은 노인을 보며 음흉한 노인네라고 눈을 흘길지도 모르겠다. 늘씬한 육신의 여성은 젊음을 뽐내며 앞을 향한다. 상징은 희미해지고 의미는 휘발한다. 공원에 앉아 싱그러운 젊음을 가진 마른 여성들을 보며 쿤데라는 죽음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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