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에게(Talk To Her, 2002),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요즘 따라 내 이야기가 떠오르질 않는다. 적고 지웠다 다시 뭉개기를 반복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버린다. 블로그 운영에 부침이 있긴 했어도 요즘처럼 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요즘이다. 물론 불현듯 새로운 생각들이 글감이 되어줄 리 없다. 이곳저곳 웅덩이를 파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수고로움이 없는 이상 시간은 문장을 불러오지 않을 것이다. 하긴 글은 늘 안 써지게 마련이다. 화가이자 포토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유명한 미국의 사진작가 척 클로스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만큼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감이란 없는 것이다. 뇌수가 내리치듯, 고개를 들다 찬장에 머리를 박아서 생긴 아찔한 통증과 같이 찾아오는 글이란 없다. 지금도 축축 처지는 어깨와 신변잡기로 쏠린 정신을 가다듬고 양손을 깍지 끼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좀 쓸 만하다고 느껴지는 생각들은 어째 죄다 잠들기 전에 찾아온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라져 버릴 우려에 메모라도 하고 싶지만, 노곤한 몸은 이불에서 지척거리기만 한다. 어제저녁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가 머리 안을떠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제목만큼이나 근사한 굴곡을 가진 이야기다. 인상적인 음악과 잘 빠진 화면, 낯선 배우들의 명연기가 빛나는 작품이었지만, 내게 유독 기억에 남는 건 ‘그녀에게’라는 짧은 중얼거림뿐이다. 원제 talk to her처럼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를 향한, 그녀를 위한, 그녀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영화엔 한 여자를 지켜보기만 하는 베니뇨라는 남자가 있다. 간호사인 그는 밝은 성격에 말이 많지만, 좋은 말로도 착해서 생겼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따분한 녀석이다. 지나치게 여성스럽고, 취미는 길 건너편 발레 학원의 그녀를 바라보는 일뿐이다. 그렇다 베니뇨는 발레 학원에서 춤추고 있는 알리샤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알리샤가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되자 헌신적으로 간호한다. 미동조차 없는 그녀 앞에서 그는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난 그저 그녀가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그를 멀리할 것이라고 생가할 뿐이다. 조바심나고 위태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본다. 위험한 순간을 오고 가고, 윤리적 고민의 지점들을 풀어 넣는 이야기다.
어떻게 받아들이기에 따라 이 영화는 더럽고 치사하기도 하고, 숭고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건 어디까지가 개인의 윤리적 판단에 달려있는 문제일 것이다.
내가 관심이 가지는 지점은 의식이 없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베니뇨, 그 옆 병실에서 마친가지로 코마 상태인 자신의 애인을 바라보는 저널리스트 마르코의 존재다. 마르코는 자신의 애인과 이성적으로 멀어지려 한다. 그는 사랑의 종결을 바라볼 때 이 사고를 맞이했다. 미처 끝내지 못한 연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사랑을 감추고 억제하며 이제는 또 다른 삶을 떠올린다. 베니뇨가 끝없는 대화의 시도, 신세 한탄을 넘어선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동원해 그녀와 통하려 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내 심정적 동류는 아마도 마르코와 같을 테지만, 늘 이야기를 주절대는 베니뇨를 신기한 듯 흘깃거린다.
베니뇨의 이야기는 두서가 없고, 정리도 되지 않는다. 문장을 만들어 떠들기만 할 뿐 의미는 짚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저널리스트인 마르코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공책에 정리하며 현실의 고독을 버텨나간다. 그에게 있어 의식 없는 자와의 대화는 껍데기뿐인 헛짓이다. 그녀와 대화를 원하던 베니뇨는 끝내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강간한다. ‘그녀에게’라는 전달의 메시지가 베니뇨에겐 끝내 섹스라는 행위로 점철된다. 돌아오지 않는 응답을 향한 그의 마지막 응신이다. 하지만 마르코는 어떤가. 대답 없는 연인을 묵묵히 지켜보던 마르코는 결국 의식 없는 그녀를 두고 떠난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난 남겨진 자가 삶의 비극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았다. 삶의 죽음의 경계선 위에 정처 없는 시간을 붙자고 선 두 남자의 고독한 시간들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다. 어쨌거나 알리샤는 깨어난다. 그의 강간 범죄 여부와 상관이 있는지, 그의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판단하는 건 내 몫이지만 난 유보한다. 그저 우연이라고, 이것이 영화라고 젠체하며 결론짓지 못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말과 육체를 통해서 어쨌거나 서사의 굴곡을 만들었다. 기적이라는 선물을 줘야 함이 마땅한 이 척박한 땅에 그는 윤리적 해법을 통하지 않고도 해방에 이르렀다. 비호감에 범죄자라도,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그릇된 선택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라는 말로 요약되는 사랑의 행위들은 별스러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성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응답을 들었다.
달 밝은 밤 뒤척이던 나는 별안간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떠올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로 처음 만났던 이 서글픈 이야기 역시 누군가의 부재에 관한 쓸쓸한 중얼거림이다. 남편의 자살, 재혼, 새로운 마을에서의 삶. 이 영화에서 한 여성은 부서진 삶을 뒤로하고 바다마을에서 적응해 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늘 자신을 세상에 혼자 남겨두고 떠난 자살한 남편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암흑 속의 그에게 말을 걸고, 때론 어깨를 흔들어 보채며 채근한다. 하지만 답이 없는 그는 뒤돌아보는 것마저 아낀다. 응신 없는 삶의 미로에서 헤매던 여자는 잔잔한 바다의 잔물결과 합쳐지는 어둠의 통로를 목격한다. 통로의 끝에 빛나는 환상성을 본다. 물론 아득하리만치 먼 꿈이다. 잠에서 깬 여자는 아마 남편도 자살하기 전 철로 위에서 저 빛을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환상의 빛이다. 우리가 스스로 삶의 지탱하기 위해 거는 주문. 마법과도 같은 착각. 알면서도 그냥 믿어버리는 것. 그녀를 간호하던 베니뇨가 내뱉던 별거 아닌 것들과 죽어가는 그녀를 앞에 두고 글을 끄적이던 마르코의 절망 역시 같은 맥박으로 합쳐진다. 알모도바르와 미야모토 테루의 사이에는 요단강이 흐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에게 그들의 공유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만큼 보편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