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힐러리의 TV 토론을 보며 닉슨을 떠올리다.
트럼프와 힐러리의 양강 구도로 개편된 현재의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 과연 오바마만큼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이 존재나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과거에도 잘생기고, 언변이 좋은 백인 남성은 미국 대통령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부시 이후 머지리 같은 백인 남성에 지친 국민들이 오바마라는 대안을 택한 건 무너져 내리던 미국 사회에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 후보 TV토론회를 보며 과연 더 나은 미국이란 게 존재나 할 수 있을지 깜깜하기만 하다. 왜냐면 두 사람의 화법, 지적인 유머 구사, 여유라는 측면에서 과거 어느 대선보다 질이 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 밖에 없던 레이건도 이번 대선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과거에 미국 대통령의 화려한 언변은 헐리우드를 통해 영웅시되었다. 자연스레 잘생긴 배우들의 미국 찬양 드라마가 되기 일쑤였다.(해리슨 포드가 에어포스원을 타고 적을 물리치던 광경은 잊고 싶다.) 그에 반해 미국 대통령의 치부를 드러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 작품도 꽤 많았다. 그중에서 올리버 스톤의 <닉슨>이란 작품이 있는데, 앤서니 홉킨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한 닉슨 전 미 대통령 역을 맡아 무너져 내리는 정부와 그의 인생 스토리를 긴박하게 써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는 이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은 그 이후 방송 대담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다룬 영화다. 대통령에 관한 영화들은 할리우드에 차고 넘친지만,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대통령의 화려한 언변이 역으로 자신을 먹어버리던 그 날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론 하워드 감독은 <프로스트 vs 닉슨>을 통해 1984년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사임한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 ~ 1994)을 새롭게 조명하는 영화다. 론 하워드 감독의 공력을 믿고 개봉 당시(09년) 개봉관을 찾았는데, 당시 23살 나는 솔직히 뭔 소린지 잘 못 알아먹었다. 그저 TV 브라운관 위로 떠다니는 패자의 얼굴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프로스트의 반질반질한 성공 가도만이 알 수 없는 호흡으로 기억된다.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나이 차가 만들어내는 아스라한 슬픔을 느끼며 영화를 덮었다.
프로스트가 닉슨과 대담을 하게 된 계기가 이 영화의 초반부를 흥미롭게 한다. 프로스트는 한때 뉴욕에서 정통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를 꿈꿨다. 하지만 짙은 쌍꺼풀에 화려한 옷을 입는 그는 뉴스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 이후 프레임 밖으로 밀린 프로스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방송을 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마치 뉴스와 안 맞아 예능으로 떠난 탈 아나운서 전현무나 김성주 MC를 생각하면 되겠다. 가령 탈출 예술가를 묶어 강물에 빠뜨린 뒤, 노란색 타이를 매고 눈썹을 찡긋거리는 데이비드 프로스트는 행복하지 않다. 그는 여전히 뉴욕을 동경했고, 호시탐탐 돌아갈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부패한 전직 대통령 닉슨처럼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패자였던 것이다. 프로스트는 현재의 광대놀음이 지긋지긋하다. 그런 그에게 남들 다 침실에 있을 이른 아침, 자신의 퇴임 방송으로 4억 명의 군중을 TV 앞에 모이게 한 미 대통령 닉슨이 눈에 들어온다. 84년 8월 7일 정오의 일이다. 백악관 인근 그를 캘리포니아로 데려다 줄 공군 1호기가 대기 중이고, 그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TV에 잡힌다. 닉슨은 비행기 입구에 서서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승리의 V자 표시를 보냈다. 그 순간 프로스트는 확신한다. 저 사람을 가지고 방송을 하면 나도 다시 뉴욕으로 가겠구나.
이후 시점은 닉슨 쪽으로 옮겨진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스캔들로 인해 지지율이 바닥을 친다. 그렇다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마음도 없다. 그의 생각에 자신의 공이 과보다 훨씬 더 컸다. 실제 닉슨 대통령은 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중국과 정치적 화해, 중동 국가들을 미국의 우군으로 만든 공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외교적 능력은 대중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했다. <닉스 재선을 위한 위원회>가 상대 진영을 도청한 사실이 발각된 것 역시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선거본부에서 버젓이 발각된 이 사건에도 그는 당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악관 지하실에 자신의 모든 발언이 기록된 테이프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이 청문회에서 밝혀졌음에도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자신들을 평생 괴롭혔던 정치꾼 닉슨을 제 손으로 처단하겠다며 탄핵 소추 안을 가결시키기 직전이었다. 한 가지 유일한 위안은 부통령 포드가 자신에게 지워진 모든 혐의에 관한 소송을 중지시킨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고, 그는 변호사 비용을 대느라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거기에 정맥 대수술을 받고 몸은 축 처졌으며, 과거의 반들반들한 이마와 탄력적인 미소로 상대를 기죽였던 닉슨의 얼굴은 이제 홀아비처럼 처량했다. 당장 급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닉슨은 치과 의사 모임에 가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뱉어대며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프로스트는 닉슨에 거액의 인터뷰 제안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이 1977년 5월 4일간의 TV 대담을 생중계하듯 재현한다. 프로스트는 부패한 거물급 정치인 닉슨을 발판 삼아 스타덤에 오르려 한다. 또한 닉슨은 만만해 보이는 연예인 프로스트를 자기의 정계 복귀를 위한 제물로 본다.
이 흥미로운 대결의 승자는 물론 프로스트다. 역사가 그렇게 말했고, 이후 닉슨은 정계로 돌아오지 못했다. “불법이라도 대통령이 하면 그건 불법이 아니다.”라는 되돌릴 수 없는 실언과 자신의 불법적 확신을 후회하는 듯 패배자의 표정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화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런 패배의 시점이 아니다. 토론이 진행되는 중 닉슨이 짓는 표정이 가진 패배의 여파들이다. 클로즈업과 정적, 이제는 끝에 더 가까워진 인간의 왜소함이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미국의 온갖 대중들의 공격에도 백악관 안에 처박혀 반격을 도모했던 닉슨은 결국 자신의 입으로 패배를 토로한다. 닉슨이 술에 취해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도 있다. 이 장면은 영화가 만든 허구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종의 보탬을 통해 닉슨을 우리와 근거리에 있는 한 인간으로서 맞아들이는 관용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치 데자뷔처럼 떠오르는 과거 장면이 있다. 1960년 닉슨의 첫 대통령 출마(36대 대선으로 이 당시 닉슨은 낙선했다. 이후 37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당시 TV 토론회. 네 살이나 어린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는 닉슨에게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인지도도 닉슨이 높았고, 화술 역시 케네디의 닉슨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TV 스크린으로 생중계된 이 대담에서 승패는 의외의 곳에서 갈렸다. 짙은 금발에 귀족적인 외모의 케네디는 온화한 화술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공격하는 닉슨을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중들은 악당 대신 수줍은 소년을 택했고, 닉슨은 다음 대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스트는 닉슨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겨준 제 2의 케네디였던 셈이다. 닉슨이 프로스트의 옷차림과 흰 피부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대중과 어여쁜 여인 캐롤라인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상을 느끼는 지점을 영화는 세심하게 묘사했다. 이 수사에 능한 배테랑 정치인이 왜 흔들렸는가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네디와 프로스트가 그에게 안겨준 패배는 역사의 되풀이, 정치의 오묘함을 잘 보여준다.
이후 닉슨의 인생이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는 이 대담이 끝난 뒤 석 달 후(78년 1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다시 찾는다. 그 직후 언론의 떠들썩한 보도 아래 자신의 자서전을 내놓는다. 비난과 호기심으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후 16년 동안 원로 정치인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쟁점에 관한 책을 8권이나 집필했다. 훌륭한 문체에 경청할 만한 내용을 담은 정치 이론서였다. 1984년 타임지는 이렇게 썼다. 닉슨은 여전히 아이디어와 전략, 그리고 야심 찬 목표들로 넘쳐나고, 적이건 친구건 가리지 않고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199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이 미국 37대 대통령은 정력적으로 자신을 피력했다. 비록 정계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인터뷰 첫날을 떠올려보자. 차에서 내리는 닉슨의 구두가 보인다. 광택 없는 끈 있는 구두. 남이 정해준 대로 정석대로 유니폼을 입은 듯하다. 그에 반해 프로스트는 구찌 로퍼를 흔들며 다리를 꼬고 앉는다. 그런 그를 유심히 보던 닉슨은 묻는다. “그 구두 말이야, 너무 여자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는 토론 중에도 프로스트의 여자 친구인 캐롤라인을 유심히 살펴본다. 캐롤라인은 우연히 대담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향하던 프로스트와 기내에서 만난 이후 여자 친구가 된 여인이다. 실제 당시에도 프로스트의 여자 친구로서 모든 대담에 동행했다. 그녀의 존재는 그저 바비인형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론 하워드는 결정적으로 닉슨이 바라보는 프로스트의 질펀한 인생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캐롤라인을 사용한다. 그녀의 뒷모습을 좇는 닉슨의 시선은 부러움과 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 내가 좋아하는 레베카 홀이 이 역을 맡아 내 시기심도 함께 증가해다. 모나코 출신의 늘씬한 미녀 그리고 파티와 언론 시사회를 즐기는 프로스트의 인생이 닉슨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평생을 정치 엘리트로 투쟁해 온 그가 보기에 프로스트의 인생은 어땠을까. 토론이 끝난 후 프로스트는 닉슨을 찾아 그가 유심히 바라보았던 반쩍거리는 구찌 로퍼를 선물한다. 그 옆으로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고, 이제 스러져버린 한 정치인의 인생도 별다른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