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소송에서 영화 컴플라이언스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소송>을 좋아한다. 카프카적인 이라는 형용사가 의미하는 바를 적확하게 알 수 있다. 그건 부조리, 아이러니, 의아함, 불가해함, 모호한 등 카프카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묘사들을 모두 포괄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은행 간부다. 그는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선량하다는 주석을 덧붙이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매사에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의 성격에 기인한다. 달변인 K는 능숙한 화술로 자신의 권익을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무래도 정을 나눠주기 힘든 깍쟁이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신을 포장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우리는 오늘도 회사에서 이런 사람과 잡담을 나누며 살고있다. K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심스런 송사에 휘말린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군가의 중상모략에 의해 고소가 되어 잡혀간 것'이다.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수감된 지 1년 만에 그는 사형에 처해진다. 그가 정을 주기 힘든 캐릭터이긴 하지만 당혹스럽다. 법원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민중의 촛불이 아니던가 어찌 죄가 없는 이를 처형할 수 있는가. 복잡한 속내는 현실의 창으로 날아든 벽돌처럼 무겁다.
K보다 더 질이 나쁜 인간이 판사로 선임되고, 죄를 알 수 없는 K가 그에게 심판당할 수 있는 도시. 이 사회구조엔 벽과 같은 암흑뿐이다. 대상이 없늗 분노로 책을 덮게 되고, 괴물이 되어버린 사법체계 앞에서 한 인간의 존재가치는 희미해진다. 그리고 이 소설이 현대문학에 있어 어떤 선을 그었는지 대충은 짐작게 한다.
우리는 카프카의 <소송>을 읽으며 생각한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어떤 역할이 어울릴까. K일까, 저 판사일까. 아무래도 판사라면 좋겠다. 그럴만한 힘이 없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모른척하는 요제프 K의 친구들처럼 어리석음을 피할 길이 없다. 카프카는 소설 <소송>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관료주의적 시스템의 폭력과 굴종에 대해 말한다. 이 소설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내가 살아 숨 쉬는 2016년 서울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사회구조에 의한 희생에 내가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지, 이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되어 있는지, 난 K가 끌려갈 때 안도의 한숨을 쉬지는 않을까
카프카의 소송과 괴를 같이하는 동시대의 영화가 있다. 미국에서 벌어진 실화사건을 다룬 작품이기에 흥미롭게 다가온다. 영화 <컴플라이언스>의 배경은 한적한 교외의 패스트푸드점이다. 패스트푸드점의 금요일은 정신없이 분주하다. 지점장(매니저)인 샌드라는 가뜩이나 지점장한테 찍힐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인데, 알바들은 말도 잘 안 듣고 일손이 모자라 더욱 신경이 곤두서 있다. 이때 경찰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금발 머리의 여직원이 손님의 돈을 훔쳤다고 엄포한다. 19살 배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인으로 몰리고, 경찰의 협박과 폭언에 겁을 먹은 산드라는 어쩔 수 없이 배키의 가방과 옷, 그리고 알몸까지 수사한다. 감시를 원하는 경찰의 요구에 일손이 부족한 샌드라는 자신의 약혼자 밴을 불러 배키를 감시하게 한다. 이후 성추행과 강간, 폭언과 감금까지 믿기지 않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속에서 울분과 분노가 교전을 이루고 끝내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도 이러는데 과연 한국은 어떨까 하는 탄식을 하게 된다. 영화에서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물론 명확하다. 신분사칭을 통해 배키를 도둑으로 몬 전화 속 범인은 명료한 악이다. 하지만 가해자는 수두룩하게 딸려나온다. 이 사건을 지켜보고 간접적으로 참여하여 배키를 위험으로 몰아넣은 방조자들이 있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느껴졌던 답답함이 그대로 재현된다. 가령, 이 범죄를 종용한 보이스피싱을 한 중산층의 남자의 경우에는 성추행과 강간을 종용했지만, 실제적으로 행한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실제 미국에서 단순한 처벌로 끝이 났다. 그렇다면 실제 성추행을 행한 샌드라와 그 남자 친구 역시 협박과 종용에 의한 비이성적 상태로 증언되어 중형을 피했다. 위 두 범인은 매스컴에 나와 경찰이라고 속인 남자에게 당한 것뿐이라고, 본인들 역시 오히려 직장에서 잘리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한다. 그렇다면 명백한 피해자가 있음에도 가해자는 끝내 처벌을 받지 못한 것이다.
카프카의 소송과 영화 컴플라이언스가 동류의 지점에서 만나는 결론이 있다면 강자에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관료주의적 사회 시스템의 폐해다. 나보다 더 권위가 있는 이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의무. 하지만 그 복종의 대상이 온전치 못할 때 무너지는 인간들의 마음. 책을 덮는 순간의 아픔과 영화를 다 본 후의 무력감은 그 마음을 가리키는 중량감이다. 이 영화를 보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그 유명한 저서《권위에 대한 복종 Obedience to Authority》에 실린 실험인 '복종 실험'이다. 왜 선량한 인간은 누군가를 전기 고문하는가. 피실험자가 고통에 시달리고, 가해자는 죄책감에 몸서리치면서도 결국 전기고문을 멈출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는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들이민다. 지극히 정상인도 시스템의 폭력 앞에 윤리의식은 무용하다. 카프카는 그 오래전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길들여지는지 잔인한 실험 없이도 문학에서 통찰을 빚어냈다.
취업이 힘들어지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젊은이들이 점점 더 늘어가면서 작업장의 업주는 곧 내 생살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절대 갑이 된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이성적 판단을 하기에는 우리의 사회적 구조가 이렇게 천박하다. 하긴 인류 기업이라고 자랑하는 어느 그룹은 노조의 탄생을 세상의 종말보다 두려워한다. 네티즌이라고 칭해지는 시대의 젊은이들은 배부르게 처먹으면서 기업에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노조를 마치 사회적 암 덩어리로 치부한다. 내가 저 기업에 취직됐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데, 매달 월급 받는 것들이 노조랍시고 만들어 기업에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꼬운 것이다. 개인은 무조건 거대 시스템 안에서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는 권위주의에 대항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를 두려워하고 지시에 익숙해져 시스템 속 부품으로 사는 건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20세기의 산물만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