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없이 IPTV(VOD)로 직행한 영화 <슬립타이트>
어제 잠들기 전에 VOD 다운로드로 영화 슬립타이트를 봤습니다. 개봉한 이후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은 검색을 했던 작품이었는데, 뒤늦게 극장 개봉 없이 VOD로 직행해버렸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 선호해서 되도록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일은 안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왠지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죠. 그래도 너무 보고 싶은 영화였고, 괄약근을 쫄깃하게 하는 서스펜스가 그리워 4천 원 주고 다운로드했습니다.
화질도 HD급이고 사운드도 수준급이라 영화의 시작부터 괜찮겠구나 싶었습니다. 그간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는데요. 영화관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물성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자주 VOD 서비스를 이용하진 않겠지만, 슬립타이트와 같이 개봉관이 아예 없다시피 했던 영화는 종종 이용해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에어컨을 켜고, 이불을 뒤집어쓴 체 봤던 <슬립타이트>는 올여름에 본 미스터리·스릴러 영화 중 가장 재밌게 본 작품이었습니다. 특유의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목덜미를 죄어오는 몇몇 순간이 범죄 영화를 보는 재미를 잘 느끼도록 해주었습니다. 제목인 슬립타이트는 곤히 주무세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제목마저 섬뜩하지 않습니까. 영화를 보시면 이 제목이 얼마나 절묘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입니다. 영화 초반부터 이 범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끝까지 범행을 들키지 않으려는 범인의 입장에서 영화를 진행합니다. 재밌는 점은 관객을 보는 저 역시 범인의 입장에서 범행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이죠. 아 이 새끼 잡혀야 하는데... 가 아니라 야 거기서 좀 더 기지를 발휘해서 빠져나와야지 하며 응원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범인이자 주인공인 세자르는 불쌍한 녀석입니다. 대머리에 인상이 완전 조폭 두목보다 더 험악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영화를 시작부터 아 얘가 범인이겠구나 확신할 수 있을 정돕니다. 별다른 기술도 없어서인지 늘그막에 건물 수위(외모로 봤을땐 천직이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병든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겨서 돈도 별로 모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최악의 비호감에 가난하기까지한 불운한 운명의 세자르는 삶의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보냅니다. 이런 그에게 사랑하는 클라라(이름이 절묘하네요.)라는 여자가 있는데요. 어느 날 자살을 하려다가 문득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힘내라!) 그 어떤 일에도 삶의 의욕을 가지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말이죠. 그리고 영화는 바로 그의 범행 현장으로 카메라를 돌립니다. 옆자리의 미녀를 두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의 모습인데요. 처음 봤을 땐 속으로 아 저런 이쁜 마누라가 있는데 죽긴 왜 죽어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자기 위해 밤마다 침대 밑에 숨었다가 약물을 투여하여 잠자리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경악하게 됩니다. 사실 텍스트로 정리해보면 덤덤하지, 막상 저 대머리 조폭이 내 침대 밑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최홍만도 세자르의 비주얼을 이기지 못할 겁니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어떤 서스펜스보다 이런 설정 자체가 무서운 영화죠.
그리고 무엇보다 세자르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는 설정들이 훌륭합니다. 인생의 낙오자에 병든 노모를 모시는 이 하류인생에게 저런 여자와 밤에 잘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을 빼앗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거죠. 실제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범인이랑 한통속이 되었구나 싶은 마음에 땀이 나기도 합니다. 글래머의 미인을 엿보는 관음적인 재미 역시 이 영화의 쾌감 중 하나입니다.
사실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일본문학의 미스테리 소설 중 한 기류인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처럼, 이 사회에서 약자가 범죄의 끄나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건물의 층별 구조와 그 안의 계급 그리고 사람들의 선입견들이 꼭 최근 개봉한 <설국열차>의 계급투쟁론을 떠올리게 하거든요. 세자르에 대한 관객들의 몰입은 일종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조심리가 작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능수능란한 세자르의 범행 덕분에 영화는 더 이상의 심각함을 앉고가진 않습니다. 범죄에 집중해서 장르영화의 쾌감이 더 중요한거죠! 계급이란 깨는 재미 외에 장르영화에선 존재가치를 가지지 못합니다.
주연배우는 스페인 배우 ‘루이스 토사’이고, 감독은 ‘하우메 발라게로’입니다. 스페인 영화답게 낯선 이름들이죠. 하지만 필모그라피를 조금 살펴보면 루이스 토사의 경우에는 프로듀서, 음악가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게 눈에 띕니다. 이것이야말로 반전 중의 반전입니다. 스페인에선 할리우드로 진출해 대성공한 하비에르 바르뎀 이상의 인지도를 지닌 배우라고 합니다. 한국에 알려진 대표작은 2010년 제36회 시애틀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셀다 211>(2010) 정도가 있습니다. 2004년에는 같은 영화제에서 <테이크 마이 아이스>를 통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니, 시애틀 영화제 하고는 좋은 인연이 있는 배우입니다. 감독 하우메 발라게로의 경우에는 한국에도 팬이 상당합니다. 상당수가 어둠의 경로를 통한 접촉이라는 점이 안타까운 점이지만,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알. 이. 씨> 같은 영화는 저도 정말 재밌게 본 수작 공포영화입니다. 여름이면 이 사람을 기다리는 제 친구도 <슬립타이트>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을 정도니까요. 토렌트와 P2P 사이트에선 나름 스타감독 중 하나입니다. 하우메 발라게로의 취향 자체가 범죄 쪽에다가, 취향도 B급 정서에 가까워 과연 차기작 중에 한국에서 와이드 릴리스 될 작품이 있을지 의문스럽네요. 그의 작품들이 꼭 한국에 정식 개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생각엔 딱 부천 국제영화제가 좋아할 만한 감독이네요. 거기서 뵐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