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xfire: Confessions of a Girl Gang 2012
미국의 1950년대를 다룬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와 <클래스>로 유명한 '로랑 캉테' 감독의 <폭스파이어>이다. 두 편의 영화는 다른 듯 하지만 같아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마스터’가 허공에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에 관한 난해한 작품이라면, ‘폭스파이어’는 미국의 1950년대 정치적 분위기를 이면에 둔 하이틴 성장드라마 위에 묵직한 주제의식을 얹은 역사드라마다. 폭스파이어는 소녀들이 반란을 꿈꾼다는 혁명적 메시지를 의식해서인지, 지나치게 좌경화된 시각을 보이지 않도록 신경 쓴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특정한 정치색을 읽긴 어렵다. 감독 로랑 캉테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1950년대라는 2차 세계 대전의 종료가 준 혼란과 매카시즘을 필두로 한 경직된 정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숨 쉬고 살 수 있었는지 일 것이다. 소녀들이 외딴 오두막에서 모여 떠드는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시대상황과 맥락엔 동떨어져 있지만, 우린 간접적으로나마 그녀들을 통해 1950년대 의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간접성은 정치적인 맥락을 찾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만한 활력이며, 이것을 소녀들의 성장영화에만 초점을 맞춰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던 <클래스>를 통해 세계적인 감독이 된 로랑 캉테는 차기작인 폭스파이어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재주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클래스에서처럼 연기 경험이 전무한 어린 소녀들을 통해 극의 활력을 얻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주영화제 개막작을 통해 처음 한국에 선보였던 이 영화는 13년 8월 정식 개봉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묻혔다.
1945년 9월 2차 세계대전의 종료되자 아시아로 냉전이 확대되었다. 이후 중국 대륙은 완전히 공산화에 안착했고, 그 결과 '대공포(Great Fear)'로 불리는 격렬한 반공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미국의 트루먼 정부는 1947년 충성 심사 의원회라는 조직을 신설하여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선다. 그 결과 우리도 익히 알다시피 미국 행정부에서 다수의 소련 스파이를 적발했고,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알저 히스(Alger Hiss) 사건이 발생한다. 알저 히스는 국무부의 관리였는데, 미국 대외정책의 수립에 상당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소련에 국가기밀을 넘겨준 사실이 발각되었으니 엄청난 혼란이 국가를 뒤흔들었음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마치 영국의 정보부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와 같은 썩은 사과가 미국 중심부에 자리했고, 이 사건을 기폭제로 미국은 반공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해진다.
1950년 2월 매카시라는 공화당 의원은 국무부 안에 57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갑작스레 선포한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미 국무부의 책임이라고 몰아세우고, 트루먼 행정부 전체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강대한 역할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기세 등등해진 매카시는 공산주의자 색출에 더 열을 올리게 된다. 현재 매카시즘은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당시 매카시의 이 허무맹랑한 주장은 같은 진영에서조차 비난을 받으며 사그라졌지만, 헤게모니의 정착을 위해 없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비정상적인 이념 싸움의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폭스파이어>에서는 정확한 년도를 표기하고 있지 않지만, 추측해보건대 매카시즘 이후 1950년대 중반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경은 미국 소도시의 작은 동네를 그리고 있는데, 당시 미국 사회의 전통 가치인 청교도적인 삶에 익숙한 동네다. 절제와 근면 성실의 분위기에 아메리칸드림의 꿈이 무르익고, 경제적 풍요가 온 천지에 긍정적인 기운을 뿜어낸다. 하지만 감독 '로랑 캉테'는 프랑스인답게 미국인의 희망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매카시즘 이후 좌경화된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소녀들을 옥죈다. 당시 소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영화적 요소들을 살펴보면 금기와 규율 같은 것들이다. 성차별에 인종차별이 만연하고, 경제적 성장을 위해서 천대하는 가치들이 남발된다. 즉, 빈부격차, 가정폭력, 소외계층을 향한 시선들이 그렇다.
일찍이 엄마를 여의고 아빠에게도 버림받은 소녀 ‘렉스’를 리더로 하여 모인 여섯 소녀들은 어리고 가난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꿈도 미래도 모두 저당 잡힌 상태에 몰린다. 이렇게 살면 미래가 뻔해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혁명의 단초다. 소녀들은 폭스파이어라는 모임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직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행위는 실패라는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흥겨움이 더 했고,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사실 너무 귀여웠다. 혁명의 동지는 국경선을 넘어가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에 나서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어렸을 적 꿈을 위해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이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 소녀들의 타오르는 불꽃 역시 저 각기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 우리는 그저 그 불꽃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폭스파이어를 조직하고 그들이 하는 행위란 마치 여성해방 전선처럼 여성을 박해하는 남자들을 골탕 먹이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녀들이 여성해방 이외의 활동에 나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가축을 비좁은 우리에 가두고 키우는 가게를 비난하는 피켓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여성을 박해하는 행위 그다음으로 동물에 대한 연민을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소녀다운 설정이며, 영화 자체가 혁명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것을 절묘하게 비켜나간다. 장면 둘, 처음 본인들만의 집을 산 폭스파이어 멤버들은 이후 조직의 운영을 자율적인 배분의 방식을 따른다. 돈을 버는 사람은 돈을 내고, 아닌 사람은 집안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의 방식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주의의 문제점들이 소녀들의 작은 집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재미있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멤버는 열이 받고, 돈을 못 버는 친구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또한, 새롭게 들어온 멤버들이 규율을 우습게 여기는 기존 멤버들을 일갈하는 장면도 비슷한 사회 이념의 맹점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어쩌면 소녀들의 심리는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가장 좋은 생태계 인지도 모르겠다. 로랑 캉테 감독은 이 작은 생태계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거의 생초보에 가까운 배우들을 캐스팅해서인지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좋은 배우 두 사람이 유독 귀엽더라. 이 영화의 화자가 되는 매디 역의 케이티 코시니다. 화자인 매디는 훗날 폭스파이어를 그리워하고, 우려스러웠던 시선으로 이 영화를 진행시킨다. 과잉에 대한 분출에 대한 슬픔과 폭발을 잘 조율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관람 포인트였다. 특히, 사랑하는 친구 렉스와는 동성애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만큼 가깝지만, 또한 가장 저 멀리서 생각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가슴은 가장 가깝지만 머리로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이 멜로드라마처럼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