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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3. 2018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초행, The First Lap, 2017

아무도 독립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2017년, 작년 한 해 한국 독립영화는 저조한 관객 수를 기록했다. 손에 꼽을 수 있는 작품이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이러다가 독립영화라는 말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위기감마저 든다. 5명 스텝과 디지털카메라 하나 들고 영화를 촬영하는 홍상수의 극단적 미니멀리즘밖에 대안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뭐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 않지만) 작년 한 해 나온 한국 독립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초행>이다. 김대환 감독의 <철원기행>(End of Winter, 2014)을 좋아했던 분이라면 그의 후속 작품을 기대했을 것이다. 관조적인 카메라와 마치 그 자리에서 같이 있는 것 같은 현장감.  자신의 정년 퇴임날에 느닷없는 이혼을 선언하는 아버지라니. 철원의 2박 3일은 길고 지난하다. 김대환 감독은 한 가족의 식사자리에서 가족의 역학을 조명한다. 이어 개봉한 <초행>은 비슷한 장력을 가지고 영화의 초점을 7년 차 연인에게로 옮겨간다.

이 두 배우(김새벽, 조현철)에 대해 말하고 싶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남 여 배우다. 현실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연기를 한다.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기에 앞서 우선 한국 독립영화에 대해 짧게(?) 얘기해보자. 인디 영화(Independent Film)라는 말로도 불리는 독립영화는 일반 상업 영화의 체계, 영화의 제작·배급·선전을 통제하는 주요 제작사의 소수 독점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 제작된 영화를 의미한다. 마치 부모 말 안 듣는 가출 청소년처럼 모든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빈곤한 상태로(혹은 스스로 자초한 제한된 영역 안에서) 영화를 만든다. 이들의 가치는 그 제한성에서 나오는 현실성에 기인한다. 사실 현실성이라는 건 돈이 적은 영화가 가진 제한된 선택의 폭과 같은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영화의 최대 강점이 현실 속에 만연한 문제들을 끄집어내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걸 알아봐 주고 (돈이 안될 걸 알면서도) 돈을 대주는 소규모 투자자(영화제, 국가지원 프로젝트, 개인 투자자 혹은 자비ㅠㅠ)에게 고마울 뿐이다.

영화가 현실에 가까우면 어떨까. 공감이 솟아나 관객이 몰릴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대부분의 경우 반대다. 한국의 무수한 TV 드라마들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을까. 그것이 현실에 가까워 수많은 어머니들이 일일 연속극을 보기 위해 곡기를 끊고 TV 앞에 시간 맞춰 앉는 것일까. 어머니 그 드라마 나중에 다시 보기로 봐도 되잖아요. 아무리 말을 해도 그녀는 듣지 않는다. 과거 드라마를 나보다 더 좋아했던 내 여자 친구는 퇴근 후 나와 있는 단 두 시간의 시간에도 조바심을 내곤 했다. 그녀는 나와의 시간보다 드라마 본방사수에 더 큰 가치를 뒀다. 재벌 2세, 출생의 비밀, 비 현실적인 세트, 모두가 실장님 아니면 이사님,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은 돈 많은 재벌에 기대는 것뿐이라니. 최근엔 제작 채널의 다양화로 인해 많이 나아졌다지만, 이런 막장 스토리들이 끊이지 않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건 왜일까. 그건 현실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의 지리멸렬과 이별하고, 퇴근 후에 피곤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단순한 캐릭터들이 급전직하를 반복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당의정에 쌓인 이야기에 돈이 몰리고, 그 껍질을 깨려는 자는 시스템 밖으로 내몰린다. 그것이 TV 드라마가 매번 똑같은 얘기만 하는 이유다.

한국은 식구라는 말을 쓴다. 같이 밥을 먹는 사이를 중요시하고, 그 밥상머리에서 곡진한 얘기들이 나온다. 그걸 피하고 싶은 사람은 고개를 들고 밥을 먹기 어렵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왜 이렇게 인기가 없을까. 일일 드라마처럼 만들면 될까. 물론 그러면 영화관에 안 가고 TV로 보지. 독립영화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이야기들이 현실과 밀접하고, 우리가 삶에서 무수하게 접하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 몰두한다. 사는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영화까지 그렇게 고민에 쌓여있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멀어진다. 투자를 받을 재간이 없다. 나는 또 다른 말로 이것을 예술적 심미안의 부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지켜보지 못하는 건 현실 회피의 영역이다. 삶을 향해 예술가가 던진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술이 일률적이 되고, 형태가 느슨해지면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된다. 심미안이란 남들이 모른 척 지나간 삶의 누추함을 들추는 것이다.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들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다. 예술가가 공들여 만든 창조물이 가리키는 방향은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세상의 아름다움이 다채로운 결로 빚어진 것을 발견하는 행위다. 지구를 가루로 만드는 영화만 보다가는 우리는 영영 독립영화가 추구하는 현실 세계의 디테일에 무감해질 것이다.


영화 초행, 굳이 왜 그 길을 가냐고 묻는다면


이제 <초행>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서두는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 이 영화는 내가 앞서 말한 독립영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가진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침대다. 남자는 고양이에 대한 사진을 보다가 그것을 키울지 말지 이야기를 한다. 여자는 이에 대해 ‘우리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작심한 듯 남자에게 팩트 폭행을 가한다. 우선 여자는 생리가 2주 늦어진 상태다. 둘째로 그들은 곧 월세가 올라 이사를 해야 할 형편이다. 셋째로 “이 망할 놈아 그 고양이는 누가 밥을 주고, 똥을 누가 치우냐. 그리고 양육비가 한두 푼 드는 줄 아냐.”라는 말이 여자의 표정에 서려있다. 남자는 이내 견디지 힘들었는지 물을 마시겠다며 자리를 피해버린다.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별개의 생각을 한다. 같은 고민일지 몰라도, 그 고민의 끝은 서로를 빗겨간다.

김대환 감독은 이 오프닝 신으로 이들이 처한 상황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남자의 아버지는 곧 환갑을 맞는다. 결혼을 염두하고 있는 두 사람은 찾아가야 할 상황이다. 서울에서 삼척까지 경차를 몰고 가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여자의 어머니는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아 헤어지기를 바라는 눈치다. 영화의 모녀는 대화를 통해 여성만이 가진 긴밀한 연대와 배반의 공기를 집요하게 훑는다. 그 숨 막히는 투샷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난 도리질 치며 안도했다. 여자의 아버지는 정년퇴임이 가까워 결혼을 종용하길 서슴지 않는다. 영화의 표현대로라면 스스로 악역이 되어서라도 그들의 결혼을 독촉해야 한다. 영화는 잔인하게도 이에 그치지 않는다.(김대환 감독은 천생 독립영화 감독이다) 여자는 방송국에서 잡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라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남자는 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있지만 더 나은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돌파구를 찾으려 없는 살림에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현실의 조건들에 치여 요원해 보인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미술계의 현실에 남자는 낙담한다. ‘나 그런 거 못하는데’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숙인다. 남들이 의례 한다는 체면치레와 아부, 뇌물 공여 등을 서슴지 말라는 친구의 조언은 어떤가. 그런 능력도 안 되고, 그렇게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직은'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여전히 그는 미혼이고 결혼만 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살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여자가 심각한 문제를 말할라 치면 회피하기 바쁘다.

 

자 이기적인 남자의 입장을 뒤로하고 여자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자. 앞서 말했듯이 여자는 안과 밖으로 압박을 받는 중이다. 임신에 대한 불안감과 부모의 결혼 독촉, 직장에서의 고용 불안. 하지만 이제 유일하게 몸을 기댈 수 있는 남자마저 그녀에겐 골칫거리가 된다. 그녀는 한 번 잘해 보겠다고 남자의 아버지 환갑잔치에 간다. 남자의 부모는 아버지의 음주 문제로 이혼한 상태이다. 거친 주사를 부리며 욕지거리를 하는 남자의 아버지. 결혼은 지옥이니 꼭 살아보고 하라며 조언을 건네는 어머니. 그들의 누추한 생계와 꼴에 시댁이라고 매 명절마다 여기 와서 익숙하지도 않은 동태전을 붙일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길은 멀고 고되다. 옆의 누군가 묻는다. 너는 왜 힘든 길을 굳이 가려고 하냐. 안 그래도 되잖아.

이건 우리 모두가 속에 염두에 둔 생각하기 싫은 문제들의 집합체이다. 이 차분하고 정적인 영화에서 숨을 트일 공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극 안에 가득 채워진 긴장감 속에서도 두 사람이 탕수육과 짬뽕을 먹는 장면은 포근하다.(하지만 이는 꿈처럼 보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서 어묵 국물을 먹는 장면들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그 아늑함이란 일상에 치인 문제들에서 빗겨 날 때 나오는 행복이다. 이 잠시간의 망각은 그들이 아직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이불 안에서 저마다의 고민에 몰두하더라도 서로의 눈을 죄의식 없이 볼 수 있는 이유다.

내가 보기엔 이 커플은 결혼, 직업, 주거, 돈, 가족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제거한 상태에서만 행복해 보인다. 이쯤에서 우린 묻지 않을 수 없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해?' 늘 목젖 부근에 이 질문을 달고 다니는 난 이 영화가 건내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인다. 이 거친 초행길을 걸어야 하는 걸까. 작은 소형차는 타이어에 문제가 나고, 여자의 유일한 네비 마저 작동이 성치 않다. 이제 그들은 더 좁은 집에서 등을 맞대고 고민할 것이다. 소주 한 잔 하고 자빠져서는 도통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이는 다시 돌아와서 왜 독립영화를 보느냐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왜 결혼을 하고, 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느냐. 깊은 고민과 사색의 시간이 없이 살다가 는 하루도 버티기 힘든 날이 다가올지 모른다. 제대로 된 질문이 없는 곳에 정답이 있을리 없지 않은가.



구원찬, Fisherman -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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