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Apr 20. 2018

권태가 일상을 잠식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리처드 예이츠 저

며칠 전 사무실에서 문득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책 한 권 읽는 것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책과 영화밖에 즐길 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닌지 짐짓 심각해졌다. 커피 한 잔 들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고르고, 상영 대기시간 동안 카페에서 책을 읽는 것이 온전한 행복으로 믿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행복의 순수함을 의심하기로 했다. 사무실 창밖으로 테니스 채를 들고 웃으며 걸어가는 후배들을 본 건 그때였다. 나도 다른 걸 좀 하고 싶었다. 이제 나도 테니스 채를 구입하기로 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리처드 예이츠 저

난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느끼는 압박을 견딜 수 없다. 그저 남들이 하는 것이니 나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어버린다. 난 직업선택에서도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난 최대한 빠르게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을 버는 사회인이 주는 안정감이 있어야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구실이 된다. 내 직업은 모험이 적고, 자유시간이 많은 안정적인 직업이 되길 갈망했다. 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상을 찾았고 안착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직업이 안정이 되자 다양한 취미를 원했고, 취미가 정해지자 그럴싸한 차를 가지고 싶었다. 이제 어느 선배는 십 년 후의 너를 보며 고삐를 늦추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느 후배는 결혼을 해야 마땅한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난 듣고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일상이 반복되면 권태가 찾아온다. 이 친구는 이름처럼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모른척 하기 힘들어 조금만 대화를 나누다보면 날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물건, 음식, 삶의 패턴, 사람까지도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더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처음엔 욕심 없이 접근했던 그 무언가에 더 큰 매혹을 요구한다. 일상에서 반복은 행복을 불러오지만, 그 반복에 권태도 섞여 들어간다. 난 권태 씨가 내 집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찾아내서 줘야 한다. 이것만 사면 더 행복할 거야. 이것만 이루어지면 내 삶은 풍성해지겠지. 커피를 처음 마실 땐 그 씁쓸한 맛에 거부감이 들지만, 한 잔 한 잔 마시다 보면 커피가 주는 그 씁쓸한 맛이 어느새 싱겁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면 에스프레소를 찾게 되고, 커피 한잔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 몇 잔을 마셔도 부족함을 느낀다. 인생이란 그런 익숙함과의 싸움일 것이다. 옷 장 속 입지 않은 옷들이 그런 나를 대변해준다.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데 보냈던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1888~1976)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을 대학 교양 시간에 배운 것이 언 10년이 되어간다. ‘삶의 무의미성’과 그것의 극복을 ‘권태’의 문제와 연관하여 다루고 있음에 난 열심히도 이 지루한 책을 읽었다.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다. 그것은 삶이란 그저 공허한 시간 속에서 삶을 견뎌내는 자의 초조한 마음과 같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앞에 두고, 한없는 기다림으로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존재가 아닌지 하이데거는 평생을 거쳐 고민한 흔적을 책에 새겼다. 난 이 책의 이론을 오늘 소개할 권태에 관한 영화 혹은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 2008

리처드 예이츠 대표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영화보다 소설이 ‘권태’라는 주제를 더 깊게 다루고 있다. '샘 멘더스'의 영화가 고독의 풍경을 배우들의 표정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기분을 자아냈다면, 책이 말하는 권태란 지극히 일상적이고 탐미적인 표현을 통해 구축한다.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보수적인 에이프릴과 그에 못지않게 보수적인 프랭크는 곧바로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뉴욕 맨해튼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에 보금자리를 꾸리게 된 두 사람. 모두가 안정되고 행복해 보이는 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그들의 사랑과 가정도 중산층의 삶을 이룬다. 하지만 잔잔한 호수엔 돌을 던지고 싶지 않을까. 반복되는 일상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권태를 느낀 에이프릴은 꿈을 찾아 프랑스 파리로 떠나길 원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의 이민을 꿈꾼다. 새로운 삶을 찾게 되는 것에 들뜨고 행복하기만 한 두 사람.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려는 찰나 프랭크는 승진 권유를 받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좀 더 안정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떠나려는 에이프릴에게 머물 것이라 통보하는 프랭크.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두 사람은 그 간극을 지우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로 분류했다. '표면적 권태'는 자기 자신이나 혹은 내 앞에 있는 상대 때문에 생기는 어떠한 상황에 잡혀 공허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비 본래적 권태'라는 말과 같이 쓰는데, 원래는 권태롭지 아니한데, 외부적 영향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권태는 어떤 식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 때우기가 가능하다. 비 본래적 일상생활에 몰두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서 권태를 잊어버리는 최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권태는 혼자 놀기를 잘하거나 삶의 일시적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여러 가지 취미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 비록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진실 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긍정이라는 혹은 재미라는 최면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때울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긍정의 힘’이란 바로 긍정할 수 없는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겁다 말하는 것을 취함으로써 얻는 환각 작용인 것이다. 그저 호기심 가는 대로 인터넷, 쇼핑, 관광, 패션, 레저, 관음을 마구 섭취하고, 뒤로는 상대와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사회문제와 같은 자기 밖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마저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신 잡담이나 호기심에 의존하여 ‘원래 사람은 다 그런 거야’라며 세상 다 아는 표정으로  대충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그 대가로 허무의 퇴락을 반드시 치르게 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 2008

이에 반해 내 삶은 지금 이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죽어있다고 믿는 '깊은 권태' 가 있다. 이는 '본래적 권태'라고도 말하는데, 이 권태는 시간을 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일상의 신변잡기에 몰입하려고 해도 깊은 권태는 언제나 뾰족한 가시처럼 당신의 일상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이 무조건적인 깊은 권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존'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실존이란 개별자로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상태 그 이상이다.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끝까지 탐구하여 본래의 자기를 완전히 찾아내는 삶인 것이다. 이러한 삶의 개혁 욕구는 깊은 권태에서 출발하고, 신변잡기와 호기심의 충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깊은 슬픔이 바로 본래의 삶이라 말한다.

남편 프랭크는 전형적인 표면적 권태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에이프릴이 임신하자 그것을 빌미로 현실적 무게를 강조하며 파리로 가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다. 그에겐 눈 앞의 승진, 안정된 집, 경제적 풍요로움, 마약, 불륜, 술, 담배 등의 크고작은 가치판단의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그와 다르게 깊은 권태를 가진 사람이다. 에이프릴은 자신의 삶을 개혁하길 원한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과 같은 깊은 권태를 느끼고 있으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동반자라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존을 찾아내길 원해 그를 설득했지만, 자신이 임신한 아이 때문에 그 계획이 망가졌다고 생각하자 아이를 일부러 유산시킨다.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자극하는 외부적 요인을 끊임없이 찾으며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표면적 권태를 가진 남자.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보다는 삶의 호기심을 통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권태라는 병에 진통제를 투여한다. 테니스를 하고, 골프를 치고, 좋아하는 글을 쓰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일상의 고약한 악취는 계속해서 날 권태롭게 할 것이다. 난 에이프릴과 같은 사람을 견딜 수 없다. 하이데가 말한 실존이라는 것이 에이프릴이 말한 꿈을 찾아 떠나는 파리행 비행기라면, 당연히 그다음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그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태에서 변혁하길 원하는 상대는 버겁다. 난 결과적으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프랭크의 입장에서 고통받으며 에이프릴의 존재를 견뎠다. 과거 연인이 내내 떠오르며 근심했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정해져 있고, 이대로 살다가는 난 전락하여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루함에 빠질 것이다. 반복으로 취하는 권태와 일탈의 행위가 자아내는 허무를 견딜 수 있는 뽀족한 수를 알지 못한다. 항상 나는 내 삶을 가엾게 여긴다. 오늘도 신문을 펼쳐 꼼꼼히 기사를 살핀다. 날 바꿔줄 길이 나타날지 몰라 손톱을 뜯으며 빼곡한 글자를 더듬는다.

작가의 이전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