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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7. 2018

의식하지 않고 말하기

영화 <꿈의 제인> Jane, 2016

성 소수자에 관한 영화에 이제 익숙해졌다. 처음 LGBT를 다룬 영화들을 접했을 땐 유독 그 소재에 천착해 작품을 읽곤 했다. 지나친 의식, 과잉의 분석이 감상을 방해했다. 마치 그것은 신선한 우유에 포함된 수많은 성분은 모조리 무시하고 오로지 지방의 함량만을 따지는 것처럼 미련하다. 난 줄곧 이렇게 일갈했다. “이 우유는 살찔 게 분명해, 그래서 먹기가 좀 그래.” 어제 <꿈의 제인>을 두 번째로 보고 나서 내가 한 생각은 섹슈얼리티 진위 여부가 아니었다. 눈 둘 곳 없어 두리번거리는 소수자의 사랑을 향한 애처로움이었다. 내 익숙함은 의식하지 않았기에 소중했고, 영화를 향한 온전한 애정이기에 아늑했다. 모두가 바라보는 방향과 조금만 어긋나도 불편해지는 세상에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오히려 소리 높여 다른 쪽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도 있다. 그건 자신을 스스로 도마 위에 올리는 행위가 주는 숭고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째 조금만 비틀어서 생각하며 나를 미워해달라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중 2병의 악다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쭉 이어지는데 행복은 드문드문 인 이런 개 같은 인생”을 향해 혼자 살아 뭐하냐며 새된 소리를 내는 제인의 목소리가 유달리 잘 들리는 게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두부같이 희고, 몽롱한 눈망울의 이민지

제인은 좋은 사람이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재워주고, 자신은 술집에서 가발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어느 날 미러볼을 들고 퇴근한다. “내가 그걸 왜 가지고 와”라고 술집 주인에게 쏘아붙이고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춤을 춘다. 영화는 총 두 파트로 나뉜다. 제인이 소현을 찾아오는 첫 파트와 그녀의 죽음 이후 가출 청소년의 혹독한 삶을 다룬 두 번째 파트다. 화자인 가출청소년 소현은 첫 파트에서 제인과 행복한 여정을 함께한다. 우연히 자살을 하려다가 제인에게 붙잡혀서 그녀와 같이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꿈이라는 건 영화 곳곳에서 문신처럼 발견된다. 그건 2부에 해당하는 가출청소년의 일화를 마치 다큐처럼 메마르게 연출한 것과 연관이 있다. 몽롱하고 나른한 표정의 소현의 자살과 제인의 등장을 이어 붙이는 연출도 이것이 꿈이거나 상상임을 의도적으로 표출한다. 제인은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조명 아래서 유유자적한 걸음을 선보인다. 소현은 제인 덕분에 남자 친구 정호에게 버려진 상처를 메우고, 정 많은 아이들을 만나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시시하지 않은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제인의 죽음은 판타지의 종료이며, 2부와의 전후관계를 복잡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혼란은 여기서 부터다. 

맑고 당당한 지수역의 '이주영'

소현이 다시 몸을 뉘일 곳 없는 서울 바닥에서 구르다가 정착한 곳은 또 다른 가출청소년의 집이다. 아마도 제인을 만나기 전으로 추측되는 일을 겪는데, 또 다른 버려짐과 상처의 연쇄작용이라 글로도 적기 싫다. 영화는 극적으로 제인의 등장 전과 후를 확연하게 구분하여 현실과의 분리를 암시한다. 자신을 보살피려던 또 다른 가출청소년 지수가 제인과 같은 모습으로 건물에서 추락하고,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마주한다. “사실 저는 지금 또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 이제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예요.” 다시 혼자가 된 소현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정호 오빠를 처음 만났던 시간을 기억해낸다. 현실 속 제인은 이때 처음 등장한다. 소현의 꿈과 상상보다는 조금 못한, 그럼에도 곧추 선 턱만큼은 끝내 기울이지 않는 그녀 제인은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서는 참이다.     

아무리 많이 웃고, 그 신비로움에 동화되어 넋을 놓고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도 난 <꿈의 제인>이 슬픈 영화임을 안다.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고개를 돌린 체 입 꼬리를 올려보아도 난 목구멍에 묵직한 게 걸려 있다는 걸 의식한다. 왜냐하면 제인의 사랑은 명백히 실패했고, 숭고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방향성도 이내 흐려지고 말았으니까. 영화가 현실과 상상으로 비교적 명확하게 구조를 나누었을 때 취하려는 건, 두 이야기의 대치이자 비교다. 두 이야기는 시신을 묻는 행위, 추락하는 사람, 고립된 소현을 위하는 여성(소수자)과의 연대라는 방향성을 공유한다. 이는 제인과 지수의 일치화이며, 현실과 허구를 버티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성소수자로 등장하는 제인은 현실의 대안적 존재이다. 현실의 지수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음으로 몰릴 때, 제인은 그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담배 한 대를 남겨두고 죽음을 택한다.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소현은 거짓말을 통해 지수의 죽음을 외면하고, 제인이라는 대안을 통해 현실과 분리해낸다. 제인의 화려한 가발, 소수자라는 빗나간 방향이 소현에게는 현실을 멀리할 수 있는 좋은 거리감을 준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끝내 소현이 미워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린 좋은 꿈을 꾸다 깨고 말았고, 그 끝엔 미세먼지만 코에 잔뜩 끼는 서울의 하늘만 창문으로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영화 <오늘 영화> 중 <연애 다큐>, 구교환 연출 및 주연

구교환에 대해 한 마디 할 시간이 왔다. 내가 그를 본 때가 언제인가. 독립영화에서 가리지 않고 출현하던 시절? 연말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던 지금? 구교환은 잘 알려진 대로 배우이자 감독이다. 내가 기억하는 구교환은 분명 <오늘 영화>, <서울연애>에서 서울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던 관찰자이다. 그는 투박한 핸드헬드와 정든 패닝을 통해 서울을 면밀하게 분석하던 서울 사람이었다. 난 그의 영화와 그의 연기를 늘 관심 있게 지켜봐 왔다. 조금은 어색한 염색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힙합 바지. 반항기 어린 눈과 어눌한 말투는 상업영화의 기민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제인을 통해 주류의 배우가 되었다. 기쁘면서도 마음 한켠이 아프다. 이제 못 보는 건가. 지금 난 꿈의 제인을 통해 화려하게 메인스트림으로 들어선 그의 다음 출연작을 검색해보고 있다.     

'제인'이라는 꿈으로 도망치려는 '소현'을 끝내 현실로 끌어내리는 이는 '지수'다.

영화가 택한 가장 이색적인 소재는 팸 문화다. 가출 청소년들이 스스로 가정을 만들어 아빠, 엄마, 아들, 딸 역할을 한다. 돈과 시간을 공유하는 작은 사회주의 구조에 아버지는 가부장을 자처하여 가족들을 통제한다. 난 일찍이 이 소재를 김영하 작가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통해 읽어본 바 있다. 영화와 소설의 실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은 때리고 짓밟고 몸을 팔아 팸을 유지한다. 이탈에는 벌금과 폭력을 통한 꼬리 자르기가 만연하고, 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제인이 말했던 사람이 시시해지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 아직 입에 맴돌 때도 영화는 가차 없이 무너진 사회를 조망한다. 영화 말미 제인이 성소수자라는 것은 기억에서 지워진다. 유유히 고개를 쳐들고 거리를 걷는 우아한 걸음걸이만 떠올리는 것은 그녀가 현실에서 분리되었기보다는, 그녀를 성소수자로 인식하지 않는 ‘의식하지 않음’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비단 소현의 거짓말, 아니 현실회피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지만 끝내 시시하지 않았다.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 - Moving Through Life, 영화 꿈의 제인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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