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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22. 2018

낭만이 머물던 익명의 공간

영화 <버닝>, BURNING, 2018

포크너 같은 작가가 되길 희망하는 종수는 아르바이트로 택배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문창과 졸업생의 암울한 현실은 외면하기로 하자) 비록 싱크대 옆에 변기가 붙어있는 허름한 방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에겐 노트북을 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낼 자기만의 공간이 절실했다. 종수에게 고향집은 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성마른 기질에 시도 때도 없이 화를 참지 못하고 일을 망치는 아버지. 그런 남편을 피해 일찍이 집을 나간 어머니. 때 이른 결혼으로 종수의 인생에서 사라진 누나. 종수는 성인이 되자마자 집에서 나와 자취방에 내몰렸다. 가까스로 대학은 졸업했지만 밀린 학자금 대출과 막혀버린 취업 길은 답보할 수 없는 걸음을 불렀다. 종수에겐 아직 세상이 미스터리 덩어리 그 자체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 신은 의식할 수 없다. 거칠게 쌓아 올린 콘크리트 잿빛 도시는 난제를 암시하는 형상으로 비친다. 달동네 어두침침한 방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소년의 뒷모습은 이 영화가 내디딘 시선이다.

영화는 메타포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비닐하우스와 꿈, 우물 심지어 벤과 해미까지 어떤 매개로서 종수에게 엄습한다.

금요일 늦은 저녁 집 앞에서 <버닝>을 보았다. 이번 주 개봉 영화 치고는 극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좌석 중간쯤 앉아 허기진 배를 편의점에서 산 빵과 우유로 달랬다. 아 이창동의 신작이구나. 드물게 나처럼 혼자서 영화관을 온 사람들이 보였다. 이제는 어딘가에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든든하다. 마치 독서처럼 영화 역시 지극히 사적인 경험임을 의식할 수 있다. 97년 PC 통신으로 만난 요즘 연인들의 풍속도를 세련되게 연출한 영화 <접속>(1997)을 기억하시는지.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서울 종로 3가의 피카디리 극장(지금은 피카디리 CGV란다 TT) 앞을 비춘다. 전도연은 비 내리는 날 혼자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혼자 보러 왔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불이 켜지기 전에 슬그머니 나와 버린다. 당시만 하더라도 뭔가를 혼자 한다는 것이 남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행위였다. 혼밥, 혼술 등 다짜고짜 ‘혼’ 자를 붙이며 홀로 되기를 유세하는 지금과는 다른 형상이다. 내겐 북적이는 도심에서 드물게 고독할 수 있는 극장마저 혼자일 수 없다면... 갈 곳이 없다. 내게 극장이라는 암흑의 카타콤은 이제 제한된 보폭이 유일하게 확장되는 영역이다. 몸을 뒤로 기대고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뻔한 인생이 놓쳐버린 무수한 가능성을 타진하듯, 영화는 회한이라는 그물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종수는 느닷없이 자신 앞에 나타난 해미를 사랑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는 마찬가지인,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이 속 편한 것도 다름없는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잊는 것이다. 음식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배가 고프지 않듯, 고양이가 이 집에 살고 있음을 잊어버리면 외롭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어릴 적 친구라는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 유대를 이뤄낸 시간을 기억할 수 없다. 해미는 종수가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하지만, 종수에겐 없는 기억이다. 어릴 적 두 사람이 나눈 유일한 대화는 종수가 해미에게 기습적으로 던진 ‘넌 너무 못생겼어’라는 한 마디뿐이다. 그 기억은 해미에겐 상처로 남아 각인되었고, 망각하길 주저 않는 종수는 그녀 입술의 옅은 온기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있다.

유아인을 좋아한다. 나랑 비슷한 연령대에 이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찾을 수 없다. 텅 빈 얼굴이 좋다.

영화 <버닝>를 보고 나면 세 명의 대문호를 떠올리게 한다. 윌리엄 포크너,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스캇 피츠제럴드. 포크너는 이 영화의 화자인 작가 지망생 종수와 겹쳐진다. 극 중에서 종수는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연상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포크너의 소설 중 <Barn Burning>(헛간 타오르다, 윌리엄 포크너 단편집 중, 현대문학, 하창수 역)를 자연스럽게 불러온다. 헛간 방화를 통해 신흥 귀족에 대항하는 가난한 백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종수는 저항이라고 할만한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기득권에 항거하기는커녕 본인의 거처를 특정할 수 없는 처지다. 난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영화의 시작점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윌리엄 포크너, 윌리엄 포크너 저, 현대문학, 2013

해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간다. 방에 사는 고양이를 종수에게 부탁하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몇 달의 시간이 그림처럼 침묵 속에 흘러간다. 그 사이 아버지는 또 사고를 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아버지가 부재한 집의 어린 송아지를 처분하기 위해 그토록 싫었던 고향집에 방문한다. 글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질 않는다. 아니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 종수가 글을 쓰는 장면은 아버지의 탄원서를 대필할 때뿐이다. 그가 글로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은 종수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던 고향 마을의 유지다. 종수의 머리는 복잡하다. 구직도 해야 한다. 의지할 곳 없는 소년에게 생계는 감당하기 버거운 고난이다. 그보다 더 가혹한 건 본인이 해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마치 해미의 부재가 자신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마음의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프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이다.(영화의 개봉에 맞춰 문학동네는 ‘반딧불이’라는 소설집을 통해 이 소설을 재 발간했다.) 영화를 본 다음날 서점에 가서 이 작품을 바로 읽었다.(책은 안 샀다) 이 짧은 이야기의 거의 모든 모티브는 영화에 전부 다 인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설에서 헛간은 물리적으로 타지 않는다. 소설에서 전소되는 것은 한 사내의 정신머리다. 그럭저럭 살고 있던 한 남자는 한 여자의 실종으로 자아의 함몰을 경험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단편집, 문학동네

해미가 돌아왔다, 벤이라는 남자와 함께. 이 남자의 정체는 모호하다. 지독한 부자인 것 같기도 한데, 도대체 젊은 나이에 어떻게 저런 부를 거머쥐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 그는 ‘개츠비’처럼 의심스러운 부를 과시한다. 파티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요리를 한다. 종수는 벤이라는 남자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호하다. 해미와 단 둘이 있고 싶은데, 뭔가 얘기를 건네고 싶은데 늘 벤과 함께 있는 해미를 봐야만 한다. 유리구슬처럼 손에서 미끄러지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 같은 해미는 단 하나뿐인 친구 종수 대신 벤과 함께 산다.

종수의 앞에 불쑥 나타난 벤은 ‘위대한’ 보다는 ‘부유한’ 개츠비에 가깝다.(Great Gatsby에서 great는 ‘부유한’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근본 없는 이 부유한 남자는 하는 일도,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다. 극을 이끌어가는 미스터리의 핵심이자 데이지(해미)의 온 맘을 앗아가는 부유한 선비다. 그가 종수 앞에 포크너의 단편집을 들고 나타났을 때 포크너와 스캇 피츠제럴드는 갑작스레 조우한다. <버닝>은 이처럼 세 명의 거장들이 가진 특질과 이미지, 문학의 장력이 넘실거리는 작품이다. 포크너 문학의 무력감, 피츠제럴드의 허무주의와 연정, 하루키 특유의 메타포가 그득하다. 문학의 모호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서사의 빈 공간을 매혹적인 하늘과 서정적인 음악으로 채운다. 이는 내게 독서체험의 확장으로 느껴졌다. 영화가 문학을 수용하고, 서사의 빈틈으로 문학이 미처 하지 않은 정서를 불러오는 경험이다.  

종수는 해미를 상실한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소설은 여전히 써지지 않고, 늘 헛헛한 마음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해미는 벤과 함께 종수의 시골집(영화에서는 민통선에 근접한 파주의 한 마을)으로 불쑥 찾아온다. 해미의 고향이기도 한 종수의 고향집은 그 자체로 잔혹했던 과거를 부르는 ‘메타포’다. 이곳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이곳에서 끝을 내려고 한다. 가끔씩 포르셰를 타고 시골의 헛간(비닐하우스 혹은 축사)을 태우는 취미를 가진 벤과 다시 죽고 싶다는 욕망을 상기하는 해미.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종수는 이 어둡고 깊은 우물을 차마 매우지 못한다.

벤이라는 인물은 전형적인 하루키적 인물이다. 취향을 중시하고, 다수 속 고독을 응시한다. 의도치 않게 타자를 발화하는 것까지.

벤은 종수에게 어쩌면 모욕적인 사람이다. 그가 선사하는 윤택한 삶의 전시는 도식적이고 지극히 전형적이다. 파스타를 삶으며 음악을 듣고, 파티를 열어 친구들과 지적 허영을 나누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삶의 훼손을 감지한다.(눈치챘겠지만 지극히 하루키적 인물이다) 벤은 종수에게 늘 친절하고, 종수를 불러 손수 요리를 해 먹이고, 그의 집을 찾아 술을 사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모욕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종수의 복잡한 현실에 대비되는 열등감일 뿐일까. 빈집이 지천에 깔려있고, 인적이 드문 시골의 석양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도시의 빼곡한 밀도를 제쳐두고 그곳에서 새처럼 춤을 추는 해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청년들이 도시로 떠나버린 버려진 집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작은 숨을 쉬고 있다. 이곳에 페라리를 몰고 나타난 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불을 지르고 사라진다. 그건 물리적인 방화가 아닌 정신적(혹은 상징적)인 훼손이다.

해미라는 캐릭터가 대상화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 남은 아쉬움 정도일지도 모른다. 녀석 말대로 우물 속에 갇힌 체 끝이났다.

이창동은 매 영화마다 해독 불가한 딜레마를 던져주었다. 답은 고사하고 그 질문들에 숨이 막혀 미동조차 할 수 없게 몰아세웠다. 이창동은 지금의 청년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심한 잔소리일까, 의심스러운 눈초리인가. 조롱하고 싶었던 걸까, 연민에 가득 찬 탄식일까. 이 세상은 니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세상은 온통 질식할 것 같은 질문들의 연쇄작용일 뿐이라고. 그렇게 속 편히 웃다가 곤경에 빠질 게 분명하다며. 난 이 영화가 언어로는 근접할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았다.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표현할 수 없는 의뭉스러운 덩어리와 함께 무거워졌다. 누군가 왜 영화를 보냐고 묻는다면 한 번쯤 떠올리게 될 질문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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