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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05. 2018

우연과 죽음을 상상하는 밤

아이가 내 가슴에서 숨을 쉰다. 쌕쌕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 침묵을 온전히 품은 듯 고요하다.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아이(아기일지도)를 품에 앉았다. 낯선 내 품에 안겨서 조용히 잠든 아이를 슬슬 흔들어 보았다. 조금 들썩거리곤 다시 잠으로 빠져든다. 아이의 몸이 이렇게 따듯한지 전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안긴 건지, 내게 안긴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그 온기와 감촉에 떠올렸다. 다시 안아보고 싶었다. 표정도 좀 살펴보고, 숨소리는 어떤지 듣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난 아이를 안은 적이 없다. 아이를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애기들을 보면 귀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짐짓 다가올라치면 흠칫거렸다. 그런데 어제는 두 아이를 제 몸처럼 품고 나타난 친구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중간에 졸기도 하고, 지친 친구와 오래전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공통의 화제를 찾기 어려웠다. 서로의 일상에 같은 색으로 처진 빗금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래도 지천에 깔린 시간을 등에 업고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죽음에 관해, 결혼에 관해, 오늘 안은 아이에 대해, 아까 본 한 친구의 얼굴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학교 다닐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감정을 느꼈다. 매일 붙어 다니던 시절보다 더 많이 이 친구를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정적의 공간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새벽에 아이를 생각하며 잠시 졸았다. 불현듯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혀 보지 못하는 곳에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마치 평행우주에 뜬 달빛처럼 영롱한 빛으로 존재한다. 난 방 한 편에서 웅크리고 뜻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불안한 마음에 구겨진 옷을 털고 밖에 나가 오래전 사진들을 넘겨봤다. 마치 내 존재의 증거를 찾으려는 듯 아이클라우드를 휙휙 넘겼다.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


영화사 직원인 만희는 칸 영화제 출장기간 중 회사에서 잘린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회사 대표 양혜는 그저 “순수하지만 정직하지 않아 함께 일할 수 없다. 정직함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니까 이유는 알 필요 없다”라고 말해 만희를 아연하게 한다. 아마도 자신의 애인 소완수와 하룻밤을 보낸 만희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리라. 영문을 알 리 없는 만희는 출장지인 칸을 서성인다. 그리고 양혜가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린다. 순수하지만 정직하지 않다는 것, 자신을 감싼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한다. 홍상수의 그 어떤 영화처럼 술 한 잔 하며 떠올리는 생각들은 지친 현재와 오버랩되어 허공을 응시하게 만든다.


한편 아마도 비슷한 시간, 영화제에 놀러 온 프랑스인 클레어는 소완수와 양혜, 만희를 차례로 마주친다. 클레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나 나올법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파란색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클레어는 우연한 기회에 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들을 피사체로 삼고 찍은 사진으로 사진의 가치에 대해 논한다. ‘사진을 찍으면 찍은 사람도 찍힌 사람도 이전과는 달라진다.’ 세 사람은 폴라로이드를 통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진이 발하는 빛의 인상은 과거에 벌어진 일을 새로 음미하게 한다. 클레어는 모든 것을 찬찬히 보는 사람이다. 그건 예술론이기도 하며, 특정 대상을 사랑하길 주저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폴라로이드기가 포착한 한 인간의 변화란 속도를 늦춤으로써 생기는 작은 틈이다. 클레어의 손 안에서 고개를 살짝 돌리고 렌즈를 응시하는 만희의 표정은 지우기 힘든 아름다움이다. 끝내 어두컴컴한 해변의 굴로 걸어 들어가는 클레어는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틈을 포착하는 존재다. 마치 영화라는 막에 현실이라는 빗금을 치고 발을 내딛는 사람일지도.


장례식장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발인까지 자리를 지켰다. 관이 화장장 속에 들어가고, 난 그것에 힘을 보탰다. 어렵사리 집에 도착한 후 무거운 몸을 뉘이고 눈을 부쳤다. 오후 한 시, 도통 잠을 이루기 힘든 시간이다. 두 시간 정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들었다는 감각을 갖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멜론을 켰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리햅’이 들린다. 그녀의 짧은 생과 지옥 같은 삶의 궤적이 떠올랐다. 죽음이 도처에 깔린 일상이란 어떤 것일까. 내 좁쌀 같은 슬픔을 그녀의 비극과 대입시켜 스스로 위안을 받았다. 난 가슴 아픈 일이 생기면 더 큰 슬픔과 고통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27살의 인기 최정상의 가수였을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침대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택했다. 그건 불행이라고 감히 정의하기 어려운 끝이지만,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이 소녀가 겪었을 고초는 날 침울하게 한다. 난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가능성의 삶을 상상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안착시키고 싶은 감정을 가져봤을까. 부모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하고 죽었을까. 누군가 미워하는 마음을 삭히지 못해 에둘러 표현한 건 아닐까.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진정으로 구원이라 믿었을까. 스스로 누군가에게 얼마나 영감을 주는 사람인지 알고나 있었을까. 그녀가 오해하고 있을 세상의 어둠에 난 내 불행을 금세 잊었다.

 

영화 <그 후>

     

홍상수의 또 다른 영화 <그 후>에 이런 장면이 있다. 우연히 자신이 하루 일했던 출판사를 찾은 아름에게 사장 봉완은 나쓰메 소세키의 책 ‘그 후’를 선물한다. 홍상수 감독은 처음엔 소세키의 또 다른 소설 ‘마음’을 쓸 생각이었지만, 막상 출판사에 있는 책이 ‘그 후’ 뿐이어서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화 제목 역시 <그 후>가 되었다.(물론 <마음> 역시 무척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이런 우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엔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있다. 드러나는 구조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 생물과 같은 예술을 지향하는 마음이다.


과거 아름은 한 중국식당에서 봉완에게 믿음에 관해 말한 바 있다. "저는 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믿어요. 절대로 아니라는 걸.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언제도 죽어도 된다는 걸 믿어요. 정말로 괜찮다는 걸 믿어요. 셋째로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믿어요. 모든 게 다 사실은 아름다운 것일 거라는 걸 믿어요. 영원히. 이 세상을 믿어요." 이 무책임한 단언은 얼핏 들어보면 종교적이며, 순수한 의미의 탐미주의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우연을 긍정하는 자의 고백이다. 봉완이 우연히 집어 건네준 책을 들고 눈 덮인 연남동을 걸어가는 아름의 걸음은 유려하다. 거치적거리는 우연의 사슬을 떨쳐내고 가뿐히 발을 내딛는다.     

살면서 우린 어떻게 만났고, 왜 이다지도 소심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야 고개를 떨군 체 발을 땅에 비빈다. 운명은 낯간지러운 생각이지만, 때론 우연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다. 수백 가지의 작은 사건들과 선택들에 의해 좌우된 내 인생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에 도리가 없다. 정해진 일상의 루트를 벗어 나 목격한 생경한 광경들은 그래서 마음을 쓰리게 한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염원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 누군가는 수많은 선택 끝에 세상을 등졌고, 난 오늘도 갈팡질팡 하다가 남루한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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