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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22. 2018

낯선 도시를 에워싼 소음들

캐서린 비글로 (Kathryn Bigelow)

   

캐서린 비글로 감독을 좋아한다. 그녀에게 늘 따라붙은 서스펜스 장인, 남성적 세계관, 살 떨리는 현장감,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당혹을 붙잡는 카메라 등은 사실 부가적인 요소들이다. 날 끌어당기는 건 그보다는 일에 몰두하는 인간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한 인간이 일을 통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며, 때론 그 자체로 시간 속에 산화하는 느낌을 포착한다. 서류더미가 수북한 책상과 흩어진 감자튀김 부스러기, 어딘가 급히 떠난 듯 보이는 널브러진 의자엔 일하는 자의 자취가 있다.

그녀의 대표작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는 이라크 전장과 빈 라덴 사살이라는 지극히 특수한 상황 속에 놓여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 역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직업인이구나 하는 생각만 남는다. 폭력을 전시한다는 꾸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영화를 매번 챙겨보는 이유다. 비극의 장소에 함께 입회하여 고단한 퇴근길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직업인이 가진 딜레마란 사생활의 파괴에 있다. 일에 모든 힘을 쏟으면 하루가 단출해진다. 옷은 구겨지고 친구들은 떠나가며 그 흔한 영화 하나 볼 여력이 없다. 집에 가면 몸을 눕히기 바쁘고, 삶이 피폐해지면 가족들이 먼저 외면한다. 혼자 식당을 찾아 파스타와 커피를 주문하고 회색 소음 안에서 서류를 쳐다보는 장면은 내 맘을 쓰리게 했다. 지독한 일 중독자라 불리며 현장에서는 고성을 마다하지 않는 다혈질인 캐서린 비글로라는 사람이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그녀가 82회(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탈 때 짖던 표정이 떠오른다. <허트 로커>는 그 해 감독상, 작품상을 비롯한 6개 부문을 수상했다. 전작들을 연달아 말아먹고 감독 생명이 위태로운 차에 맺은 결실이었다.


같이 감독상 후보에 오른 전 남편이 뒤에서 열심히 박수를 쳐주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연단에 오른다. 180이 넘는 키로 성큼성큼 걷고 호랑이도 잡을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며 손을 치켜드는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허트 로커>와 나란히 후보에 오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그야말로 유력한 수상 후보였다. 전 세계의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평단과 언론으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를 열어보니 아카데미는 초록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설을 실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 때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여인의 뒷모습을 보는 제임스 카메론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서글펐다. 어쩌면 젊어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남편의 그늘에서 신음했던 그녀의 성공에 해방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디트로이트>


캐서린 비글로의 신작 <디트로이트>가 최근에 개봉했다. 다 보고 영화관을 나와 시끌벅적한 명동 거리를 걷는데 생각보다 감흥이 덜했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는 불만이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투정을 부렸다. 그녀가 만든 사무실과 상관과 갈등하고 조직의 한계에 분노하는 직업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실화의 재현에 집중되어 있는 나머지 놓쳐버린 것들이 있어 보였다. 시대의 공기, 생생한 현장감, 범죄 스릴러의 외피 등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캐서린 비글로만의 것이 아니다. 다만 내 눈에 띈 것은 디트로이트라는 공간이 주는 몇몇 상징들에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7년 디트로이트는 시민들과 경찰 사이의 갈등이 극심했다. GM과 포드, 크라이슬러로 대표되는 자동차 생산 공정이 즐비했던 디트로이트는 노동자 계급의 흑인들이 상당했다. 그들 대부분은 빈민가에 살았으며, 반대로 경찰들은 대부분 백인이어서 인종 간의 갈등이 슬슬 밖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경찰이 출동할 때마다 과도한 진압이 발생하고, 정부는 탱크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불만을 품은 흑인들을 진압했다. 경찰과 정부의 인종 차별적인 대치에 분노한 시민들은 폭도로 변해 도시를 약탈한다. 이 해묵은 갈등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시내 한구석에 자리한 알제 모텔에서 총성이 울린다. 이 총소리에 주변을 순찰하던 백인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장담할 수 없는 밤이 시작된다.


'모타운 레코드'와 '에미넴'


알제 모텔에서 경찰에 진압되는 인물 중엔 가수 지망생 '래리'가 있다. 이 삼엄한 영화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몇몇 장면들이 있는데, 래리가 부르는 감미로운 R&B가 그중 하나다.

래리는 아카펠라 그룹을 만들어 모타운 레코드에 들어가려는 가수 지망생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SM, JYP, YG에 들어가려고 전전긍긍하는 청춘이다. 낮에는 생계에 집중하고, 저녁노을이 질 즈음 연습실에 모여 손을 튕기며 노래를 부른다. 모타운은 디트로이트를 지칭하는 ‘모터 타운’의 약자로, 전 세계의 음악 엔터테인먼트의 모체가 된 기업이다. 모타운 출신의 가수로는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 마빈 게이, 슈프림스 등 미국 팝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꾼 대스타들이 즐비했다. 최근에 자주 듣는 라이오넬 리치(당시 코모도스)의 Easy 역시 모타운 소속일 때 발표된 곡이라는 걸 알고 그 영향력을 실감하기도 했다.

      

작년에 서점을 거닐 때 모타운 레코드에 관한 책을 발견해서 한 챕터 정도만 읽은 적이 있다. 이 회사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바니 엘스(Barney Ales)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모타운: 젊은 미국의 사운드>란 책이다. 레이블 설립자였던 당시 서른 살 흑인 청년 베리 고디는 그전에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인물로, 그가 모타운이란 이름을 사용한 배경은 쉽게 납득이 간다. 영화에서도 포드 자동차 직원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스타가 되기 위해 무대 뒤에서 모타운 관계자들을 훔쳐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는 에미넴이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 <8마일>이 있다. 영화 <디트리오이트>의 배경이 된 시점에서 30년 이상이 흐른 시점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빈민가의 흑인들은 랩으로 가난과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를 표한다. 2000년대 초반에 제작된 이 영화는 디트로이트의 상황이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오히려 거대 자동차 회사들의 파산으로 전보다 더 어려워진 도시 상황을 곳곳에 전시한다. 쓰러진 고철 자동차들과 깨진 유리창이 곳곳에 보이는 산업화의 재해 속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뭔가를 읊조리는 에미넴의 얼굴은 디트로이트 그 자체다.


'그랜트 힐'과 <슬램덩크>


내게 디트로이트라는 이름이 내게 익숙해진 계기는 NBA 농구팀 ‘피스톤즈’ 때문이다. 난 어렸을 적 NBA 농구스타들의 카드집을 수집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NBA를 SBS에서 중계해줬고, 마이클 조던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며 열광했다. 당시엔 한국 프로농구 출범 전이었는데, KBL 리그의 전신인 농구대잔치의 인기도 상당했다. 연고전이 그 어느 프로스포츠보다 인기가 많았고, 공원으로 나가보면 농구공을 들고 농구 허재는 형들도 많았다. 큰 티셔츠를 걸치고 농구공을 튕기는 힙합 소년들이 거리를 쓸고 다녔다.


그 당시에 읽은 슬램덩크라는 만화책은 내 인생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그 만화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얼마나 많은 공상을 했던지. 난 가끔 누군가 독서의 원 체험에 대해 물으면 허영심에 샐린저나 소세키와 같은 세계문학전집의 거장들을 말하곤 한다. 정말 당치도 않다, 내게 독서의 즐거움은 전적으로 만화책에서 시작됐다. 만화방에서 슬램덩크와 함께 먹었던 라면이 책에 대한 내 애정의 시작이다. 당시 피스톤즈 팀의 슈퍼스타는 ‘그랜트 힐’이었다. 95년 당시 제이슨 키드와 공동 신인왕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그랜트 힐은 내 농구 우상이었다. 깔끔한 외모와 신사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일요일 아침잠에 쫓겨 일어난 내 눈을 적셨다. 마치 슬램덩크 윤대협의 재림처럼 보였달까. 거친 디트로이트 선수들 사이에서도 늘 평온한 표정으로 경기를 주도해나가는 그를 보며 아침밥을 코로 먹었다. 당시 수많은 디트로이트 시민들도 힘든 생활고 속에서 그를 응원했을 것이다. 작업장 한편에 놓인 작은 TV 앞에서 그랜트 힐의 플레이를 보며 숙취를 달랬을 수많은 디트로이트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앞서 말했듯이 현재 디트로이트의 상황은 대체로 암담하다. 거리엔 텅 빈 공장과 실업자가 된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대체산업으로 나타난 아날로그시계산업이 다시 광명을 부추기고 있다.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에 따르면 디트로이트 산 시계 ‘시놀라’ 덕분에 다시 노동자가 몰리는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저 태평양을 지나 먼 도시의 이야기지만 왠지 모르게 안심하게 된다. 그건 아마도 이 도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비춰준 캐서린 비글로의 공이 클 것이다. 어쩌면 그랜트 힐과 에미넴이 내게 준 영감도 한몫했을 테지. 시놀라 시계를 차고 연단에 선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을 통해 디트로이트는 재건을 알렸다. 난 오늘 영화 <디트로이트>에 대한 글을 쓰며 한 번도 발을 내디딘 적 없는 공간과 연결됨을 느낀다.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영화 속 알제 모텔에서 총소리가 들리기 전, 파티를 즐기던 젊은이들은 존 콜트레인의 음반을 틀고 분위기에 한껏 취한다. 조금 있으면 닥쳐올 비극도 모른 체, 귀를 자극해오는 즉흥 연주에 몸을 맡긴다.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1926~1967)은  재즈 역사의 상징적 아이콘으로 불린다. 40세에 간암으로 갑자기 사망하기 전까지 재즈 신에 늘 충격을 주었다. 1959년 발표한 앨범 <Giant Steps>은 우연찮게도 모타운 레코드의 창업 시점과 일치한다. 이 앨범의 타이틀 곡 Giant Steps은 재즈 역사상 가장 어려운 코드 체인지를 적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난 그의 곡 중 <블루 트레인>을 가장 좋아한다. 아침 알람 소리로 매일 들으며 눈을 뜬다. 이제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무게를 잡는 서두와 정신없는 즉흥 연주를 휘몰아치는 후렴까지 날 도무지 잠 속에 놔두질 않는다. 난 매일 의식의 저편에서 존 콜트레인의 선율과 함께 세상에 복귀하는 셈이다. 검은 양복을 입고 열정적으로 트럼펫에 입을 댄 존 콜트레인, Rest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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