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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29. 2018

난처한 얼굴을 한 남자

소설 <그 후>, 나쓰메 소세키 저

한 남자가 길을 걷는다. 주위로 이름 모를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식당 안에 왁자지껄 떠드는 남자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의 느린 걸음과 달리 세상은 바삐 돌아간다. 그는 투명망토를 걸친 것처럼 유유히 빠져나간다. 잠시 후 근처 숲 속 길로 들어선다. 나무와 풀숲의 냄새만큼 신뢰할 만한 공간은 없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의 이름은 다이스케다. 그의 아비 말대로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도 않고 돈이나 낭비하는 백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하다 못해 짐짓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세상을 한껏 낮춰보는 눈빛과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단호한 걸음걸이가 그 사실을 명징하게 한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


나쓰메 소세키의 1909년 작 <그 후>를 읽었다. 스무 살 초입에 민음사의 날렵하고 가벼운 페이퍼백을 교보문고에서 많이도 샀다. 그 시절 <마음>과 <그 후>를 연달아 읽으며 저물어 가는 여름을 버텼다. 지난 주말 책방을 거닐다가 우연히 현암사에서 낸 소세키 전집을 발견했다. 총 14권으로 이뤄진 전집은 16년 작가 사후 100주년을 맞아 기획됐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시작으로 <명암>까지 작가의 모든 장편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다. 내 물욕은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내 발걸음을 계산대로 이끌었다.

난 양장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처럼 책을 걸레처럼 다루는 이에게 양장본은 안 어울린다. 마음에 드는 페이지는 과감하고 접어놓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무차별적인 줄 긋기는 기본이다. 마치 일기장처럼 이러저러한 메모를 적고 나서야 책을 괴롭히길 멈춘다. 이런 거친 도서 습관엔 페이퍼백이 어울린다. 왜냐하면 양장본은 가격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내게 양장본은 왠지 모르게 책장에 꽂아두고 보존해야 할 자산처럼 느껴진다. 이번 현암사의 전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성스러운 편집에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고서적을 연상시키는 판형에 사진 자료들이 상당하고, 번역에도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작가 나쓰메 소세키

오늘 아침 9시 눈을 뜨고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제는 하루가 무척 길었다. 마치 이틀은 산 것처럼 시간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새벽 2시, 월드컵 중계방송이 끝날 때까지 난 무엇을 했던가. 늘 마시던 커피를 마셨고, 소세키의 책도 읽었어. 새로 읽기 시작한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생각보다 못 읽었네. 이 책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에 얽힌 일화들을 읽고 하루 종일 베토벤 4중주를 들었지. 그는 청력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 맞지도 않는 지휘를 했다던데. 집에 돌아와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밤 산책을 했지. 동네 카페에 들러 소세키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 조금 끄적대다 노트북을 덮었지. 집에 와서는 운동을 조금 하고, 화장실 청소를 했어. 그리고 문지방이 낡아서 자꾸 삐걱대기에 나사를 조였지. 방바닥에 앉아서 조금 외롭다고 느꼈어. 그러고 보니 내뱉은 말이 없어. 이제 커피마저 모바일 앱으로 주문할 수 있으니까. 세상에 입으로 먹기만 하다니, 말이 사라지니 요즘엔 혼잣말을 하곤 해. 어제는 샤워하다가 ‘너 피부가 많이 상했다’라고 중얼거렸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놈과 눈을 마주쳤어.


<그 후>의 '다이스케'라는 인간상

     

<그 후>의 스토리는 무척 단순한 편이다. 그 시절 일본 소설들이 그러하듯 쓸 데 없고, 무가치한 것에 천착하는 고학력 한량들의 삶이 펼쳐진다.(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세계관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굴곡진 드라마는 사치스럽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소설 속 다이스케를 갈등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는 친구의 아내 ‘미치요’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미치요를 친구 히라오카에게 중매해 준 것이 다이스케 자신이다. 기울어진 형편을 가진 그녀에게 동정심을 가진 걸까. 뒤늦은 사랑을 깨닫고 어울리지 않는 로맨티시스트가 된 걸까. 본인은 그녀를 향한 애정을 자연의 뜻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그보다 더 구제불능의 언어 농단은 없을 것이다. 생의 어느 한구석 치열할 것 없는 그는 왜 이런 기행을 벌이는 걸까. 마치 자신에게 덧씌워진 사회적 기대를 일부러 배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이스케의 가학적 면모는 다른 곳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직업을 갖지 않고 스스로 경멸하는 아버지의 돈을 받아쓰는 것이 그 증거다. 그는 빵(노동)을 위한 삶이 가진 모멸감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이 부정하는 가치에 기생하며 사는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 면모는 그의 내적 갈등이 형성된 과정을 예측하게 한다. 결국 다이스케는 유부녀를 사랑한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잃는다. 사회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아버지와 형은 그를 축출해버린다.

이 느슨한 이야기에 고무줄에 걸린 젖은 옷가지처럼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휘날린다. 자본 중심의 사회로의 급격한 변동, 서구식 연애관의 등장으로 파괴되는 자의식은 그 시대의 일본 사회를 엿볼 수 있다. 소세키는 젊은 시절 일본 문부성의 지시로 영국에 유학을 간다(1900년 10월). 일본이 서구의 문물과 근대화를 도입하기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동안 심리적 압박감도 컸을 것이다. 거기에 문화적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과도한 노이로제가 정신 상태를 뒤흔들어놓았다. 1902년에는 일본 외무성 앞으로 ‘나쓰메가 미쳤다’는 전보까지 날아왔을 정도였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문불출한 체 하숙방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화두 삼아 글을 썼다. 소세키 작품의 화자라고 불리는 인간들을 죄다 비슷한데, 추측건대 그건 소세키의 에고가 투영된 인물이기 때문일 거다. 탄탄대로의 생을 살아온 소세키는 소설로 말미암아 속 안에서 발화하는 가치 전복적 기질을 마음껏 드러낸다.


삶의 밀도를 대하는 방식

       

평소 틈만 나면 삶의 밀도에 관해 고민을 한다. 결코 빈둥거리며 허송세월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시간이라는 틀에 매여 일과대로 소화하는 나를 구차하게 느낀다. 그렇다고 다이스케처럼 ‘자신이 밥벌이 문제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은 고귀한 인간’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다이스케는 한량 같은 스스로의 삶을 의미 있는 것이라 칭하고, 자신의 사상과 정서에서 비롯된 가치를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는 장미향이 나는 침대에 누워 시간이 가길 정처 없이 기다릴 뿐이다. 헛됨과 소용없음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나자빠지는 꼴이다. 내가 정신없이 쪼개며 발버둥 치는 시간을, 다이스케는 관조하듯 흘려보낸다. 소세키 소설을 읽는 재미란 이 사치스러운 시간성을 공명할 때 발생한다.     

일도 없이 유부녀나 만나고 다니는 다이스케에게 아버지는 간곡하게 정략결혼을 제의한다. 어차피 네 맘에 드는 여자는 지구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고, 결혼해도 지금처럼 놀 수 있게 지원해 줄 테니 양가집 규수와 결혼해라. 평소와 달리 측은해 보이는 아버지가 낯설지만 그는 고래를 쳐들고 이렇게 말한다. “곤란한 일입니다.” 절대적 아름다움 앞에서 한 인간은 무력하다. 이상형과 이상향을 내세워봤자 날 사로잡는 절대적 가치가 다가오면 그 매혹 앞에 무릎을 꿇는다. 어쩌면 다이스케가 받아들인 고난의 길(유부녀와 살림을 차리는 일)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혹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균일한 일상이 그 어떤 유혹에 휘말려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는 두려움 말이다. 그 붉은 기운을 소세키는 정확하게 받아 들고 내게 말을 걸고 있다. 끝내 발화하다 터져버릴지 모를 일상의 균열을 읽어냈다.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 스스로 되내었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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