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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Oct 29. 2018

폴란드로 간 아이들

The Children Gone to Poland, 2018

여럿을 적 어머니의 두부 심부름은 내게 즐거운 것이었다. 슈퍼마켓을 들렀다 문방구 앞 오락기로 백 원짜리 게임을 하곤 했다. 한 시간은 넉넉히 개길 수 있는 게임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에서도 ‘1945’라는 슈팅게임은 단연 내 주종목이었다. 이 게임의 목표는 생존이다. 전투기 조종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적에 수많은 폭탄을 투하한다. 난이도가 어려워지면, 극한의 상황에서 전투기 한 대로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유독 잘했던 캐릭터는 금발의 여성 캐릭터였다. 날렵한 기체처럼 늘씬한 몸매의 그녀는 영웅이 되어 적진을 휘저었다. 근데 왜 게임 이름이 1945지? 늘 궁금했던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료 후 수많은 전후세대의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내가 용을 쓰며 조종한 전투기들 역시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의 것이었으니. 나치스인지 연합군인지 모를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 어느 곳 가리지 않고 내 인생 전반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기억도 있다. 독일 축구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 '루카스 포돌스키'가 폴란드와의 축구 A매치에서 두 골을 넣고도 고개를 푹 숙이던 모습. 폴란드 태생의 이 청년은 실제 폴란드 국적을 가지고 있고, 고향의 친척도 모두 폴란드인이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위해 독일 국적을 택했다. 그가 프로 축구 선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명목에 맞지 않는 골을 넣었을 때 결코 하늘을 보지 못한다. 반독 감정에 휩싸여 있는 폴란드 국민들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비춘다. 어두운 낯빛을 내리 깐 그들은 나와 어떤 연계점이 있을까. 이 두 가지 기억의 연결고리는 어떤 게 있을까. 전쟁의 스펙터클은 예술이 공유하는 오락의 산물이고, 전쟁 이후의 삶은 모두 아시다시피 문학과 영화가 천착하는 대지다. 한국 문학과 영화의 주 소재가 6.25,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네 앞 오락기에도, 즐겨 보는 유럽 축구 선수들의 과거에도 아픔의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폴란드의 아픈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지 않고는 설명이 어렵다.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영토 확장을 목표로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수많은 유대인들은 무던히 죽어나갔다. 아우슈비츠의 이름으로 뇌리에 새겨진 참상은 더 이상 신을 찾을 수 없는 순간까지 다다른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고국 폴란드로 돌아온다. 하지만 폴란드는 당시 새로운 공산당이 집권하여 냉랭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역사가 남긴 의구심에 폴란드인들은 정치적으로 갈피를 못 잡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시작된 피의 숙청, 죄의식 복구를 위해 투입된 공권력이 등장한다. 공산당은 자국의 안정을 위해 전쟁의 연루자들을 잡아들인다. 스탈린의 죽음과 소련의 해체 등 폴란드는 외부세계의 변화에 호응하며 빠른 속도로 안정이라는 지상 과제를 향해 나아간다. 국민들은 봉기와 궐기의 연속으로 공산당의 몰락을 주장한다. 정부에 대한 반감이 끝까지 차오르자, 폴란드 정부는 마침내 반유대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분노를 다른 지점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한다. 유대인과 게르만인의 어색한 동거가 이어지던 중, 전후 세대의 기득권 확보에 위기를 느끼던 폴란드인들은 다시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다. 더러운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렇게 다시 가스실에 들어선다. 실수가 반복되는 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2000년의 한 축구 선수도,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던 나도 같이 굴러가고 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영원회귀의 순간처럼 모든 게 아득하다.     

내가 폴란드 역사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른바 유태인 문학, 나치 문학이라는 전후세대의 수많은 작품들을 접하면서부터다.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부터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와 같이 유대인과 독일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이 그렇다. 죄의식의 앙금이 말끔히 사라지기 전에 기억하고 되새기려는 예술가들은 전 세계로 그들의 이야기를 수출했다. 하지만 그 곁에 숨죽인 폴란드를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역사가 다뤄진 것 역시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영화 <이다>가 그 첫 시작이었다. 동구권의 이 공산주의 국가는 비행기 직항도 없을 만큼 먼 나라지만, 그 역사의 맥락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한국과 유사한 전쟁의 상흔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배우 ‘추상미’가 감독한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역시 폴란드의 삶을 추측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우리와 전혀 거리가 멀 것만 같은 이 동구권 나라가 어떤 연계점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폴란드처럼 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을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전쟁 당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처치 곤란의 상태가 되자, 그들을 당시 동맹관계가 굳건했던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위탁한다. 우연히 이와 관련된 사연을 다룬 폴란드 다큐멘터리를 접한 추상미는 이를 자신의 영화로 만들기로 한다.


영화가 가장 착안한 지점은 정서적인 파고에 있다. 그 고아들이 폴란드에 가서 어떤 감정을 겪었을지 사료를 찾고, 낯선 아시아 아이들을 돌봤던 폴란드 유대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추상미는 여기에 직접 북한 탈북소녀의 사연을 덧씌워 다소 단선적인 이야기를 복합적인 감정의 충돌로 이끈다. 결국 그녀는 과거의 사연과 지금 냉혹한 서울에 살고 있는 탈북소녀의 얼굴을 마주하여 연출적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한정적인 자료를 가진 이 영화의 소재적 한계를 두 대척점을 통해 풀어보려고 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우연에 기댄 연출이기에 불안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는 추상미가 가진 배우론이 탈북소녀이자 배우 지망생인 ‘이송은’이 가진 입체적 캐릭터다. 그녀의 개인적 사연은 아시다시피 탈북소녀라는 전형적인 상처 받은 인간상이다. 추상미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사연과 그들을 돌본 이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이송은의 마음이 열리는 지점을 포착하려 한다. 하지만 이송은은 추 감독의 의도에 좀처럼 따르지 않는다. 배우 지망생이기에 감정이 풍부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길 거부한다. 이는 배우의 개인적 사연이 예술을 행함에 있어서 필수적인지, 배우라는 가상의 캐릭터에 몰두하는 것이 과연 개인의 심적 상태와 분리될 수 있는가 하는 흥미로운 탐구과제를 제공한다. 두 사람은 폴란드에 가자마자 이틀간 폴란드를 여행하며 친분을 쌓는다. 추상미는 내심 이 과정을 통해 이송은의 마음을 열어 그녀의 사연을 영화에 녹이려고 한다. 이 인위적 과정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감독은 이를 자신의 실패로 규정한다. 자신의 개인사를 작심하고 물어오는 추상미를 향해서는 날카로운 말로 되받는 장면은 이 영화의 복잡성을 시위하는 장면이다. 이는 이 영화가 캐릭터 구축으로 얻은 성취의 장면이자, 못내 풀지 못한 응어리처럼 못내 찝찝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서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추상미가 이끈 우연의 서사는 미진한 상태에서 매듭지어지고, 마치 필름이 뚝 끊기듯이 급한 마무리를 한 탓에 작품의 얼개가 허술해졌다. 그렇지만 다룬 두 시간대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을 관련지어 하나로 겹쳐지게 만든 서사의 확장성은 퍽 인상적이다. 영화는 어쩌면 한 소녀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했기에 실망스럽다. 역사의 대지에서 송두리째 사라진 북한의 고아들은 여전히 요원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감으로 찍은 폴란드의 드넓은 숲 속에 우리는 우연의 것들이 현실의 음습한 것들과 마주하여 생긴 감정의 생경함을 마주할 수 있다. 그건 어쩌면 이 실패에 대한 연출자의 대답이다. 헤아리고 들어보고 기다리는 것, 비록 참담한 실패에 속이 상해도 그 시간 속에 스러진 것을 지켜보는 도리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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