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Oct 20. 2018

낯선 순간에 우연한 것들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오전 9시, 어제 늦은 시간까지 과식한 탓인지 유독 아침길이 시원치 않다. 가벼운 두통과 생각보다 더운 온도에 몸이 불쾌하다. 지하철 입구의 제과점, 갓 구운 빵 냄새도 전혀 향긋하지 않은 오늘. 압구정 근처의 한 카페에 둥지를 틀고 커피를 시켰다. 통증처럼 쓴 커피가 탁한 기분을 개운케 해주길 바라며 벌컥벌컥. 서울은 이중적인 도시다. 꽉 막힌 148번 버스를 타고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 염증을 내다가도, 조용한 골목길에 발을 들이면 고양이처럼 거리의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뭔가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낙관을 품은 발걸음이 머리를 식혀준다. 이 명백한 속임수는 세련된 인테리어와 귀에 꽂힌 노랫말이 주는 환각에 있다. 공간 속 공간의 도시는 채광이 좋은 카페와 작은 서점을 양산했으며, 어제와 오늘의 기분을 잊으려는 이들이 소설 속으로 몸을 누인다.      


꽤 오랜만에 동대문에서


<펭귄 하이웨이>, Penguin Highway, 2018

오후 2시, 흔한 커피집 창가에 앉아 멍하니 골목을 응시한다. 처음 와보는 곳임에도 자꾸 무언가와 겹쳐 보인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두리번거리다 보니 어느 순간 이곳을 걸었던 게 떠오른다. 내 머리는 늘 환영 속에서 항상 다른 시간, 지나간 시간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의식한다. 몽상은 생을 확장하는 비결이다. 어젯밤의 꿈과 오늘의 상상을 모아 모아 찰나의 하루를 글 속에 펼쳐놓는다. 좀 더 행운이 따라준다면, 다른 사람이 되어 은빛 호수를 떠날 수 있을지도.


오후 7시, 올해 개봉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원작자인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펭귄 하이웨이>를 보았다. 퇴근 후 시사회를 보러 일찍이 동대문역에 도착한 나는 거대한 똥의 형상을 한 DDP를 앞에 두고 감회에 젖었다. 여기서 봉황기를 보러 친구 재환이와 찾았던 게 몇 년 전인가. 그 동대문 운동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시간 속에 매몰된 공간의 추억을 되새기자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재환이의 전화가 생각났다. “이렇게 살 순 없다며,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어릴 때,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찾겠다며.” 내가 동대문을 자주 찾던 때는 스무 살 초입이었다. 두타와 밀리오레가 우리의 놀이터였던 시절, 동대문은 패션의 메카였다. 경기가 끝난 후 재환이와 티셔츠 한 장 사고 떡볶이를 먹으며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다시 찾은 동대문은 이제 외국인 관광객이 쇼핑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듯 보인다. 시사회가 열리는 동대문 메가박스는 텅텅 빈 쇼핑몰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펭귄 하이웨이>는 하늘을 묘사하길 공들여 한다. 늘 낙관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도록

11살의 소년 아오야마는 등교 길에 펭귄 무리를 발견한다. 공부도 잘하고 늘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이 성실한 공학도에게 이 사건은 뭔가를 암시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펭귄들, 소년은 이 현상에 여러 가지 가설을 들이대며 진실에 접근하고자 한다. 가슴이 큰 동네 치과 누나, 안경잡이 순둥이 우치다와 함께 ‘교토’로 추정되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펭귄의 흔적을 뒤쫓는다.


펭귄이 도심에 나타난 까닭은


<펭귄 하이웨이>의 시사회를 찾은 이유는 순전히 포스터 때문이다. 하늘색이 주는 청명한 기운이 유독 정체를 알 수 없는 회한에 젖게 했다. 오늘 서울의 미세먼지가 심해져서일까. 포스터의 하단, 날 노려보는 펭귄의 눈짓에도 아랑곳 않고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가진 하늘색 색감을 유독 좋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많은 작품들이 하늘을 이상화한 것처럼 하늘색 공간의 아득함이 좋다. 실사 영화가 보여주는 하늘은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내포하지만, 가짜 색으로 만든 만화 속 하늘은 아련한 기분을 준다. 누군가의 마우스 클릭으로 입혀진 RGB 코드에 정서적으로 감응하는 아이러니라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발주자라고 볼 수 있는 호소다 마모루 역시 하늘을 인상적으로 사용하는 작가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늑대아이>에서 하늘을 그리는 방식은 인물들이 고된 일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어김없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거기에 온 몸을 부실 듯 환한 햇살이 비추면 온 몸이 나른해진다. 그건 어쩌면 인생은 우리 생각보다 더 나은 곳일지 모른다는 정체모를 환희를 부른다.

<펭귄 하이웨이>가 빛을 쓰는 방식은 르네상스 화가의 화풍처럼 화사하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의 하늘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빛 때문이다. 빛을 사용하는 방식이 마치 르네상스 화가들의 눈부신 채광처럼 한껏 과장되어 있다. 그것이 싫지만은 않은 건, 신비한 한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본연의 빛은 그들 자신의 환상을 넘어 다른 무언가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 가진 사고의 확장성에 가장 걸맞은 도구랄까. 도시의 불빛처럼 만질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반영이자, 어머니의 품처럼 그리움을 부르는 저녁 무렵의 기대이다. <펭귄 하이웨이>에서 아이들이 거리를 분주히 걸을 때면 도시를 감싸 안은 온갖 빛이 내리쬔다. 그 순간마다 생의 여린 결을 느낄 수 있었고, 쉽게 경험하기 힘든 비범한 기운을 느꼈다면 과장일까. 온갖 CG가 도무지 가닿을 수 없는 장면까지 재현해내는 요즘 시대에서, 어떻게 애니메이션은 생존권을 확보했는지 조금은 유추할 수 있다. 일요일 오후에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르누아르의 파리 풍경에 매혹되는 것처럼, 난 애니메이션이 주는 채광의 기쁨에 못내 이끌려 뭔가를 찾아낸 거겠지.


빛과 하늘의 세상


<펭귄 하이웨이>는 세상의 끝을 품은 바다라는 개념을 통해 이 지구가 돌아가는 원리를 자기식대로 설명한다. 로맹 가리는 소설 <마법사들>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억해둬라.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진짜 무시무시한 괴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펭귄 하이웨이>는 우리가 볼 수 없지만 느껴지는 걸 작화한다. 작품이 끝내 품어 낸 바다는 세상의 막연함에 대한 대응이다. 텍스트적으로 풀기 어려운 서사의 매듭은 펭귄이라는 엉뚱함으로 사고를 눙친다. 그 딴청이 밉지만은 않은 건, 나 역시 세상엔 여전히 우리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무수한 현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바쁜 어른들은 생계에 쫓겨 애써 그것을 무시하지만, 오로지 만화를 보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세계의 일루젼을 생각한다. 이 작품으로 첫 장편 데뷔를 한 젊은 감독 ‘이시다 히로야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소년의 ‘호기심’이 좋았다. 어른이 되면 앎의 기쁨을 많이 잊게 되지 않나. 이 소년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많이 알면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

Penguin Highway, 2018, 하늘, 빛, 바다로 이루어지는 삼각법은 이 작품의 미스테리를 납득 가능하게끔 한다.

오후 10시, 나이가 들면서 호기심이 적어지는 건 왜일까. 새로운 것이 왜 조금씩 더 불편해질까. 늘 하던 짓에 편안함을 느끼고, 고정된 취향 안에 매몰된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보는 내내 내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일까, 수 백 마리의 펭귄이 날 노려봐서일까. 가슴 큰 누나가 옷을 갈아입지 않아서일까. 똑똑한 척하는 소년이 별로 귀엽지 않아서일까. 생각해보니 애니메이션이 가진 사고의 확장성에 내가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는 생각을 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내가 머릿속으로 정한 비현실의 정량을 넘어서니 카오스가 찾아온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카페에서 이런저런 몽상에 젖은 나이지만, 그들의 상상에 보폭을 맞추기 어렵더라. 고개를 흔들며 “이거 왜 이래, 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5번이나 본 사람인데 그럴 리 없어!”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좀 더 부연하자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소년들의 합의된 태도에 호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신이 나서 이 현상을 탐구하러 다니는데, 난 굳이 그들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턱을 괘거나 팔짱을 낀 채로 아이들의 모험을 관조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것을 작품의 개연성 부재와 상상력을 표현하는 방식의 고리타분함으로 말하면 꽤 편안할 테지만, 꼰대같이 보이는 걸 심히 두려워하는 나는 끝내 자책감으로 소감을 마무리한다.


오전 12시, 어두운 내 방, 침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엘레나 페란타의 나폴리 연작을 읽는다. 이 소설 속에서 나폴리를 그리는 방식은 증오와 경멸이 녹아있다. 도시의 거친 숨결과 절망하는 인간들은 술을 먹고 폭력에 휩싸인다. 그럴 때마다 화자인 레누는 친구 릴라와 함께 책을 읽는다. 그들에게 허구의 이야기라는 도피처는 현실을 잊게 만든 묘약이다. 두 사람이 처음 같이 읽는 소설은 <작은 아씨들>이다. 작은 호수 앞에서 작은 문고본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정말, 정말 좋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