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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13. 2019

이질적 단어의 샘

#1

연말 한 모임자리에 어린 시절 사진을 보았다. 스크린에 지인과 소싯적 사진을 띄워놓고 보니 따스했다. 큰 화면에서 본 어릴 적 나는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신기한 건 사진을 찍을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온 가족이 경포대에 놀러 가서 텐트도 펴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는데 기억은 무심히 흩어졌다. 어머니는 느닷없이 녹슨 앨범을 꺼내보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잠시간 뭉클해진 마음이 머물렀다. 사진을 보다가 스쳐 지나간 사람을 생각했다. 유년시절 뛰놀던 동현이 생각도 났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시간같이 느껴진다. 기묘한 환상 같달까. 난 향수에 잠겨 시간을 빠른 속도로 넘겨보았다.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갔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사진이란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억지로 붙들어놓고 죽음에 항거하는 물성을 가진 걸지도. 그렇게 18년의 시간도 미련을 남긴 체 흘려보냈다.


#2

중학교 1학년 즈음인가, 방과 후 집을 들어서면 늘 텅 빈 집과 마주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늦은 밤 녹초가 되어 들어오셨고, 유별난 사춘기를 겪던 형은 내 외로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려진 커튼과 어둑한 실내, TV가 윙윙대는 소리. 하염없이 소파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일은 내 주된 일과였다. 살짝 열려있는 형 방문 틈새로 보이는 브로마이드의 휘황한 색감. 어머니가 끓여놓은 미지근한 김치찌개 냄새. 난 그 시절을 기억 속에 남겨놓았다. 전에는 중요했던 거지만 이제는 의미를 잃었음을 느낀다. 그때나 지금이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오늘 빈집의 시간을 글로 남긴다. 이것마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서글플 테니까. 눅진 감각을 동원해 낑낑대며 얼룩이라도 닦아내려 한다.


#3

요즘 자기 전 개를 본다. 강형욱 씨가 하는 애완견 교화 프로그램을 한동안 즐겼다. 요즘엔 동물의 왕국처럼 그저 멀찍이서 지켜보는 영상이 좋다. 개의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난 녀석의 침묵이 좋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한 눈빛과 먹이를 보면 발랄하게 흔드는 몸통이 좋다. 말이 없다는 건 한결 편해지는 마음이다. 허겁지겁 먹는 소리와 끙끙거리는 애처로운 소리엔 언어 없음이 가지는 평온함이 있다. 어젯밤엔 나무늘보 동영상을 보다 잠이 들었다. 유튜브의 연관 콘텐츠는 나조차 모르는 나를 알아보곤 대초원에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날 초대했다. 늘어져서는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잠에 취한 나무늘보를 보면 세상 모든 갈등은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고 적었다. 낮이란 일상과 말이 나를 현혹하는 시간이다. 현란한 몸짓에 시간은 먼지처럼 흩어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퇴근길을 걷는다. 혼자된 밤은 낭만에 모든 걸 거는 시간이다. 고달픈 사무실의 상흔을 밤의 한가운데에서 나무늘보와 버텨낸다. 밤이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감수성의 터전을 마련하는 걸지도 몰라.


#4

평소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곤 한다. 특히 글을 쓸 때 자주 허공을 응시한다. 낯선 길을 걷다 느껴지는 상념을 볼품없는 문장으로 적고 나면 무력감이 엄습한다. 감정은 콩알처럼 축소되고 키보드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절절대며 뭔가를 적어내지만 중언부언이라는 말을 실감할 뿐이다. 인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참상을 목도하며 어찌할 바 몰랐다. 작가 ‘헨리 제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이번 일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나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 전쟁은 단어 자체를 고갈시켜 버렸다...” 이는 마치 언어의 항복 선언처럼 들린다. 작가 수전 손택은 그의 언급을 사진이 가진 단순성, 복잡한 진실을 일축하는 이미지가 글을 대신하게 된 계기로 인용했다. 말로 하기 두렵고 복잡해진 현실을 향해 언어는 역할을 잃었다. 대신 그 자리에 빛으로 새겨진 사진 한 컷이 자리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글의 복잡성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편적 기억의 환영은 서술하기 전까진 그 자체로 불용하다. 하지만 말로 읊조리고 끝내 글로 옮겨 적으면 우리는 사고는 어느 틈엔가 가지런해진다. 복잡한 현실은 변함없지만 어쩐지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남발하면서라도 우리는 어찌할 바를 적어보는 거다. 언어의 한계는 그 자체로 그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셈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가닿아 있다.


#5

요즘엔 언어의 무력감이 이모티콘으로 대체되는 모양새다. 체면과 매무새를 중시하는 사회풍토에 따라 구구절절은 구질구질의 다른 말이 되었다. 따봉과 스마일과 울음 표시가 당신의 속내를 요약해낸다. 미처 말로 하면 복잡한 생각이 이 조악한 그림으로 축소되면 맘은 편해진다. 하지만 내가 품었던 생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다. 온순한 마음과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속은 뒤틀린다. 소거된 마음 상태는 어디에 있는가.

신년에 들어서 처음 본 영화는 <고스트 스토리>다. 영화는 죽음과 상실, 공허와 고독이라는 추상적인 감각을 응시한다. 영화라는 영상매체가 할 수 있는 장점을 동원하여 서술 없이 오롯이 바라만 본다. 카메라는 누군가 떠난 자리, 무언가 남겨진 자리에 맺힌 미련을 담는다. 이모티콘을 닮은 이불보를 뒤집어쓴 귀신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도통 예측할 수 없기에 이모티콘이 가진 단순성과 대치한다. 오히려 이불보에 뚫린 눈구멍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신기하다. 같은 모양새지만 때론 장난스럽게 슬프게 우울하게 가끔은 분노에 찬 기분으로 느껴진다. 맥락 없는 이미지란 얼마나 무력한가를 증명하는 사례로 보여 안도한다. 마치 쿨레쇼프의 몽타주 이론처럼, 하나의 샷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의 샷들과 충돌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6

고스트 스토리는 스토리가 지난한 영화다. 아니 스토리라고 할 만한 서사가 없다. 그 누구처럼 한 남자가 죽었고 결국 귀신이 되어 자신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귀신은 그저 멍하니 서있다. 집이 무너지고 여러 사람을 그쳐갔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의 기억은 티눈처럼 남아 제거되길 바란다. 미련이 없어야 저승으로 떠날 수 있는 영혼의 존재론. 무슨 여한이 남았다고 떠나지 않는가. 영화가 믿는 죽음은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훌훌 털어낼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난 그 응시의 시간 속에서 이것이야말로 영화만의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서사는 그 텅 빈 시간에 결코 가닿디 못할 것이다. <고스트 스토리>는 그래서 체험의 영화이며 응시를 통해 사고의 공란을 부여하는 문학의 한 변형이다.

건너편 이웃에 자리 잡은 동료와 인사한다. 귀신은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한다. 귀신이 마주하는 집의 시간엔 침묵과 자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시간이 선형성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 인과의 틀은 깨어지고 기억은 희미해질까. 모호함 속 모호함, 삼라만상의 비틀거림. 난 어릴 적 사진을 들춰볼 때처럼 아득해져 눈을 감았다.


#7

영화를 보며 한때 살던 집을 떠올렸다. 익숙한 골목과 동네의 생김새가 그립다. 이제는 재개발되어 사라진 동네는 기억 속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이라도 좀 찍어뒀으면. 가족에게 그다지 좋은 시간은 아니었는지 그러지 못했다. 난 그 녹슨 동네가 좋았다. 아이들이 골목을 구석구석 다니며 뭔가를 숨길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곳이었다. 요즘처럼 집을 나서면 거리와 매연에 내몰리는 도시가 아니었다. 도시계획은 그런 골목을 뭉개버리고 휑뎅그렁한 도회지를 선사했다. 일률적인 네모와 구획의 단지들이 그득하다. 그게 좋은 줄 알은 사람은 합리성의 틈새에서 기생한다. 들릴 듯 말 듯 되뇐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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