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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1. 2019

대책 없이 좋아하는 것들

대성당, Cathedral, 레이먼드 카버 저

맹목적 사랑


어릴 적 친척 누나가 신승훈을 좋아했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요즘 아이돌 팬덤 못지않았다. 누나의 입시에 총력을 쏟던 큰어머니의 근심이 날로 커져갔다. 워낙 호들갑을 떠시니 당시엔 나는 그게 무슨 큰 문제라도 되는 줄 알았다. 음반을 사서 모으고, 꼬박꼬박 콘서트에 가는 건 요즘 애들도 하는 흔한 팬질 아닌가. 때는 바야흐로 미대 입시생의 가을, 누나의 열정은 독립투사 못지않았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내 눈엔 박해를 피해 달아나는 누나가 순교자로 보였다. 누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만 허락한 사랑을 한다.

내가 정작 놀랐던 건 누군가를 그렇게 맹목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종의 샤머니즘, 절대자를 향한 숭배랄까. 누나 방에 들어서면 휘황한 브로마이드와 당시에 누나가 그린 그림이 뒤섞여 무당집을 방불케 했다. 나도 듀스를 좋아했지만, TV를 보며 춤만 따라 추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에 반해 누나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나키스트였다. 신승훈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울부짖고, 문구점에서 온갖 ‘굿즈’를 사 모았다. 그 경이로운 사랑은 내 기억 속에 강렬한 자국을 남겼다. 난 한 번도 그런 열렬한 사랑을 한 적이 없다. 현재 누나는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신승훈을 잊고 산다.

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

규칙적 사랑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체육관에서 보낸다. 때론 몸이 무거워 빠질 때도 있지만 어쨌든 일주일에 네 번은 다녀온다. 내가 꾸준히 취한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다. 마치 글을 쓰고 소설을 읽듯 같은 시간에 체육관에 발을 디딘다. 편한 옷을 입고 운동화를 묶으면 삶이 잠시나마 단단해진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준비해온 음악을 틀며 몸을 자극한다. 내 주위엔 저마다 생각에 잠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눈을 흘깃거리며 그들을 보는 게 좋다. 표정은 누구라도 죽일 듯이 심각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그들에게도 평온이 찾아오리라.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그리 넓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적은 사람이 각자 위치에서 힘을 쏟는다. 늘 기꺼운 정경이다.

온전히 개인이 되기 어려운 일상이다. 현대인의 삶이라는 게 늘 부대끼고 서로에 생채기를 낸다. 그럴 때면 난 도시에 혐오를 가진다. 내게 체육관은 보기 드문 사유와 사색의 공간이다. 맑은 공기와 개울, 드넓은 대지는 아니지만 바벨 하나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오로지 통증만 생각하며 정해진 세트 수를 반복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온전한 내 일 인분을 보장받는 시간이다. 각자의 위치에 선 우린 서로 눈도 잘 마주치지 않지만 정해진 룰 속에서 오롯하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느 사무실 김 대리, 저 옆 식당 주인 김 씨. 난 상상한다. 느슨한 연대로 묶인 공동체. 안전한 취향의 비무장지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출처 : 직접

잊힌 사랑


친척 누나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더 있다. 당시 누나 방에 들어서면 신승훈 브로마이드 외에도 명화를 모사한 그림이 많았다. 당시 누나는 입시를 목전에 둔 미술학도였으니 그럴만하다. 방 안이 요란했지만 달리 보면 예술가의 작업실처럼 아기자기했다.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취만 남았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비어있는 누나 방에 들어가서 화집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미술에 관한 내 원체험이다. 미술을 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동경이랄까. 그저 네모난 프레임이 의미심장해 보였다. 당시 방에 어떤 그림이 있었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아마도 후기 인상주의 그림이었으리라. 고색창연한 그림이 주는 감흥에 휩싸인 난 침대에 쪼그려 앉아 낮잠을 잤다. 유독 그 안에서 혼자를 즐겼다. 한낮엔 정적이 온 방을 채우고 시간은 여진처럼 느리게만 흐른다.


한때 유럽 유수의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을 구경했다. 내가 그때 느낀 건 모르면 안 보이는구나. 몰라야 보인다는 순진한 예술론은 통하지 않았다. 어릴 땐 몰라도 보였는데, 왜인지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닫혀서일까. 고민하던 난 결국 곰브리치를 샀다. 졸음을 참으며 18유로짜리 게스트하우스 침대에서 책장을 넘겼다. 최근 현대미술 경향은 죄다 개념 싸움이다. 작품을 맥락 없이 보는 건 한낱 껍데기와 다를 바 없다. 제프 쿤스와 데미안 허스트를 보며 아무런 지식 없이 뭘 느낄 수 있을까. 뒤샹이 변기를 들고 와서 ‘샘’이라 명한 지 이제 100년이 넘었다. 요즘 서울시립미술관에선 데이비드 호크니가 수영 솜씨를 뽐내고 있다.


문학적 사랑


1년 남짓 유럽 생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를 꼽으라면 프랑스 툴루즈에 있는 '생 세르냉 대성당'(La basilique Saint-Sernin)이다.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카페에서 늘 책을 읽곤 했다. 툴루즈에서는 나름 유명한 곳이라 여행자도 목을 축이고, 근처 학교 학생들도 수다를 떠는 장소다. 이 카페가 단골집이 된 건 우연이었다. 성당 앞을 산책하다가 커피집 실내를 둘러보는데 곳곳에 지역 주민이 그린 그림이 빼곡했다. 창밖으로는 강렬한 햇빛과 함께 생 세르냉이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어려서부터 유럽을 동경했다. 그 기저엔 대성당을 향한 매혹이 있다. 대성당 앞에 서면 누군가의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역사를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종탑과 격자무늬 창의 아름다움. 고딕과 로마네스크의 위엄이 고루 섞인 대성당을 보면 벅찬 숨을 내뱉는다. 영겁의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가치. 평지풍파가 세상사를 뒤흔들 때도 변치 않는 위엄. 그 무거움이 좋아 늘 책을 들고 성당을 찾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대성당>은 단순한 이야기다. 한 부부의 집에 맹인 남자가 방문한다. 남편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다. 방문하는 맹인이 아내 친구라는데 처음 듣는 얘기다. 남편은 생각한다. 그녀와는 무슨 관계지? 아니 도대체 맹인을 왜 데리고 온다는 거야? 속 좁아 보일까 봐 묻지도 못해 뾰로통하다. 곧 셋은 한자리에 모여 앉아 대화를 시작한다. 어색한 웃음과 실없는 대화가 오간다. 곧 말이 없어지고 시간은 더디게만 흐른다. 그때 TV에서 대성당에 관한 방송이 나온다. 맹인은 남편에게 대성당의 생김새를 알려달라고 한다. 남편은 말로 설명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결국 맹인은 남자에게 함께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 대성당을 그려나가는 두 사람. 남자는 생전 처음 그려보는 대성당에 스스로 놀란다. 그리고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로 하긴 어렵다. 다만 평소 스쳐 지나갔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에 놀란다. 관성처럼 지나가는 일상에서 망각한 제스처를 일깨운달까. 세상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좋은 것들이 있다. 맹목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바람이 옷을 적실 때 우연처럼 다가온다. 문학은 누나의 신승훈처럼, 헬스장의 아늑함과 같이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을 흩뿌린다. 자취만 남은 감각을 근사치에 가깝게 서술한다. <대성당>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때 그려보는 소설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렇게 불분명한 감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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