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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4. 2019

술자리를 위한 변명

술 못 마시는 사람의 술 이야기

비가 온다. 내 친구는 비만 보면 술이 당긴다지만 난 그립지 않다. 가끔 맥주 몇 잔 정도는 마시지만, 그건 할 수 있다는 느낌이지 먹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나이가 이르게 찾아왔고, 엄연한 업무의 연장으로 회식에 참여해야 했다. 이때부터 술은 피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되었다. 처음 배치된 부서 실장님은 다들 거나하게 마시는 자리에서 맥주 한 잔만 홀짝이는 내게 ‘자네는 술을 싫어하는 모양인데, 나이를 먹으면 몸이 먼저 술을 달라고 할 걸세’라 하셨다. 지금도 잊지 않은 그 말을 난 철석같이 믿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유심히 생각해보니 과연 내 주량이 그 당시보단 꽤 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때때로 맥주를 비롯한 와인과 위스키를 스스로 홀짝이는 날 마주한다. 술을 마시는 게 좋지는 않지만, 자리의 부담감을 덜기 위해서 입을 댄다. 또 즐거운 사람들과 있을 땐 그 자리를 기억하고 싶어 술잔을 높이 든다. 특히 오랜 시간 공들였던 프로젝트를 마치고 팀원들과 입에 술을 털어 넣을 땐 인생의 몇 안 되는 확고한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요즘은 술이 제스처이자 분위기라는 걸 깨닫는다. 그저 술잔을 부딪쳐 왁자지껄하면 여유와 낙관이 생긴다. 그래도 여전히 회식은 부담스럽다. 혹시라도 실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 똑바로 차리며 마신다. 넋 놓고 몇 잔 홀짝이다 중요한 자리에서 퀭하게 취해버린 기억이 있어 조심스럽다. 스무 살 초입엔 술자리 게임을 자주 했다. 문제는 벌칙으로 술을 마시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취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그야말로 술이란 오바이트를 유발하는 물질이구나 깨닫게 된다. 특히 소주의 독한 맛은 도무지 술이라는 것을 좋아할 수 없게 한다. 그러던 나도 돈을 벌어야 하니 술을 수단으로 쓰고 버티기 위해 소비한다.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어 분위기를 타며 마신다. 여러모로 나이가 먹는다는 건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나를 응시하는 과정이다.


회사 신입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술자리라면, 첫 승진 기념 회식이다. 직장 상사의 강요로 말버릇이 나쁜 이들과 악다구니를 쓰며 술을 마셨다. 직위를 이용해 술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그런 행동을 마치 인생의 관문인양 당연시하는 눈빛들이 서러웠다. 나이를 먹으며 지켜야 할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술은 내게 요주의 영역이다. 반면교사의 표본이 되어준 몇몇 어르신들을 상기하며 도리질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더러운 술 문화 받아들일게요.


중학교 시절 학업엔 젬병인 나는 이른바 논다는 아이들과 어울렸다. 사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니 그 애들 주변을 서성거렸다. 당시 녀석들은 소주를 어떻게든 구해내 노래방에 가지고 들어갔다. 어른들 눈을 피해 진탕 마시고 뻗었다. 그 독한 소주를(당시는 프레시도 없었어) 벌컥벌컥 들이키며 위용을 과시했다. 더구나 여자애들 눈을 의식하니 더벅머리 중학생은 안하무인의 돈키호테가 되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막상 검을 빼고 돌진하려니 위장이 버텨줄 리 없다. 선천적으로 술이 약한 친구들은 그대로 화장실에 오바이트를 쏟아냈다. 죄 없는 노래방 사장님만 불쌍하지. 당시에 나도 몇 번 소주를 쏟아냈는데 아직도 그 끔찍한 기억이 선명하다. 생각해보면 술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한 게 그 시절이니, 내가 지금의 주량을 갖게 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이 있었노라.

요즘에는 술을 안 마시는 사람도 많다. 이른바 웰빙의 시대에 맞게 관리 차원에서 거절한다. 혹은 술도 일종의 취향으로 가려 마신다. 술로 뭔가를 이루기에는 냉혹해진 사회 시스템은 더 말해 무엇하랴. 인간을 관리해야 할 리스트에 두고 술을 그 도구로 삼아 인맥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거의 사라졌다. 술이 사고를 일으키고 이성의 틀을 무너뜨린다는 인식이 생겼다. 주류회사들이 스스로 도수를 낮춰가도 이 흐름을 막을 순 없으리라. 하지만 술을 안 먹는 사람이 점점 더 증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내 풀어진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기 싫다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강해졌다. 예전엔 약점을 드러내는 게 친해지는 과정에 속했는데, 지금은 취해서 실언이라도 뱉으면 얼빠진 놈으로 낙인찍는다. 그래서 선후배 관계없이 취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바야흐로 취하기 힘들어진 시대다. 직장인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인간관계가 조직 위주로 재편됨을 뜻한다. 주변의 인간관계가 여간 부지런하지 않은 이상 예전의 친구들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래서 편하게 술 마실 수 있는 자리가 드물다. 술잔을 노니며 속을 터놓을 사람을 찾기 어렵다. 매일 보는 부서원에게도 내 약점을 노출하길 꺼린다.


요즘 아버지는 늘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와서 자기 전에 드신다. 누가 볼 세라 주스 잔에 따라서 빨리 들이키신다. 난 그걸 볼 때마다 애써 모른척한다. 그 모습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쇠락을 느낀다. 아버지가 점점 더 무뎌지는 느낌에 사무친다. 내가 한 잔 같이하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으면서.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취한 모습을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신다. 나 역시 아버지에겐 세상 불편한 사람 중 하나가 된 걸까. 모든 게 어제만 같은 추억들이 지나가고 술이라는 것이 주는 물성도 변해만 간다. 나도 점점 더 변해서 모든 게 끝나갈 무렵 내 술잔을 채워줄 친구가 곁에 있을까. 술은 생각과 생각을 부르는 더딘 숨결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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