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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5. 2019

여태껏 양복 딱 한 벌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The Lincoln Lawyer, 2011

나는 여태껏 양복을 딱 한 벌 샀다. 유니폼을 입는 회사에 다니니 양복 입을 일이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경조사에 입었으나, 요즘엔 번거로워 그마저도 외면한다. 매일 청바지와 운동복만 입던 내가 양복을 사게 된 건 형 덕분이다. 형이 취업에 성공한 후 첫 월급으로 내 양복을 뽑아줬다. 양복이란 게 꽤 비싸서 그걸 꼭 사야 해, 라고 물었으나 이내 형을 따라나섰다. 동생에게 첫 양복을 입히고픈 마음이 느껴져서다. 형제란 게 이런 경우 꽤 어색한지라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가산 디지털 단지역 근처 아웃렛에서 종일 발품을 판 끝에 첫 양복을 샀다. 굳은 표정으로 새 양복을 받아 든 난 겸연쩍음을 들킬까 봐 더 퉁명스럽게 형을 대했다. 방에서 몇 번이고 걸쳐봤으면서도 관심 없는 척. 왜 그랬냐고. 나도 잘 모른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역시 모셔놔도 도통 양복 입을 일은 생기지 않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슈트는 근사하지만, 도무지 입을만한 빌미가 없다. 요즘엔 결혼식마저 양복을 입는 게 촌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결혼하지도 않는데 굳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평소에 입고 나갈 일은 더더욱 없고, 가끔 조문 갈 일이 생겨도 소식을 듣자마자 서두르느라 양복을 챙기지 못한다.

내가 양복을 개시한 날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면접을 볼 때다. 면접 당일 난 분명 알람을 맞추고 잤는데 울리지 않았다. 그날 한 시간이나 늦잠을 잤다. 전날 긴장해서 이런저런 말을 준비하고, 말도 안 되는 데 정신이 팔려 인터넷을 하다 새벽에 잠든 탓이다. 나는 말 그대로 벌떡 일어나 5분 만에 준비하고 면접장소로 출발했다. 신설동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데 정신이 아득했다. 엄마에게 진창 짜증을 부리고 나와 마음도 불편했다. 바싹 타는 입술 감각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렇게 내 첫 양복의 기억이 악몽으로 바뀔 때쯤 지하철 검은 창으로 내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다.

어렵사리 도착해 사정을 설명하고 면접을 치렀다. 백수에게도 볕 들 구멍은 있게 마련인지 난 여전히 그 회사를 잘 다닌다.

그 날 홍역을 치른 탓에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목이 타 동네에서 커피를 샀는데, 칠칠맞지 못하게 양복 상의에 쏟아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대충 닦아내고 내 모습을 거울이 비춰봤다. 우습게 생긴 놈이 멀뚱히 여름날을 견디고 있었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난 앞으로 꽤 수월한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껏 달아오른 마음이 금세 식듯 이후 난 양복을 찾지 않았다. 여름엔 덥다고 안 입고 겨울엔 춥다고 피한다. 이게 춘추복의 맹점이지. 하지만 거릴 걷다가 근사하게 양복을 입은 훈남을 보고 있노라면 부러운 게 사실이다. 집 근처가 여의도라 슈트를 입은 남자를 많이도 본다. 사회생활 초기엔 복장이 사회적 지위로 느껴져 괜스레 주눅 들었다. 유달리 말쑥한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많은 동네라 더 그랬나 싶다. 이탈리아에서는 복장에 따라 식당에서 자리 배치도 달라진다는데, 한국 역시 서구의 영향으로 복장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친다. 내가 뭘 입느냐에 따라 자신감이 달라지고 나이를 먹으니 누군가를 판단할 근거가 없어 복장으로 판단한다. 편협한 시각이 날로 커져 쉽게 사람을 재단한다. 그런 의식이 결국 멀쩡한 승용차를 바꾸게 하고, 사는 동네를 말할 때 계급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을 입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는데, 괜스레 편견만 늘어 어쭙잖은 차별에 동참한다.


영화 <링컨차를 탄 변호사>의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근사한 슈트 맵시를 자랑한다. 내가 아는 가장 슈트가 멋진 영화다. 워낙 몸이 좋아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지만, 이 영화에서 매튜는 그야말로 흰 셔츠에 입은 검은색 클래식 양복이 눈부시다. 영화 자체가 법정 스릴러라 슈트밖에 입을 게 없으니 작정하고 패션쇼를 한다. 난 커피를 홀짝이며 내내 매튜의 맵시에 감탄을 보냈다. <링컨차를 탄 변호사>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영화지만, 메튜 맥커너히가 보여주는 변호사 캐릭터가 가진 프로페셔널리즘과 멋들어진 양복이 잘 어울린다. 메튜 맥커너히가 맡은 역할은 제멋대로 놀면서 잘난 척만 해대는 거만한 변호사 ‘믹 할러’다. 그는 늘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정의를 기만하고 돈만 밝히는 속물이지만, 탁월한 입담과 승소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질로 늘 승소한다. 마치 셜록처럼 스피드와 정확성이 촌철살인이다. 하지만 범죄자 변호를 도맡으며 사방에 적이 생긴다. 범죄자에게 거액 수임료를 받고 탁월한 통찰로 위기를 넘기지만 그를 못마땅해하는 놈들이 협박한다. 역시 잘생기고 돈 많으면 살기 어렵지. 믹 할러는 제 양복을 갑옷처럼 입고 그들에 맞선다. 난 믹의 양아치 조폭과 다를 바 없는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옷맵시에 현혹된다. 복장이 사람의 격을 높이고, 영화의 질까지 높이는 기분이랄까. 믹 할러는 집도 절도 없지만, 기사 딸린 고급 자동차 링컨 컨티넨털을 타고 다니는 허세남이다. 재밌는 점은 그런 방탕한 삶을 살아감에도 셔츠만은 눈부시게 새하얗다는 점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상 보이는 게 다라는 그의 말에 수긍한다. 믹 할러는 클래식 슈트를 통해 직업관을 구축한 셈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육체와 거침없는 말투로 승승장구하던 믹 할러는 어느 날 한 사건을 수임하며 위기에 빠진다. 어쩐지 건방을 좀 떨더라니. 이후 전개는 영화를 직접 보시라.


요즘 TV에서도 메튜 맥커너히 못지않은 맵시를 자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 많은 드라마와 교양 프로그램의 멋쟁이를 다 제치고 내게 대망의 1위는 <그것이 알고 싶다> 김상중이다. 그의 착 달라붙는 반듯한 양복과 3:7 가르마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신뢰가 간다. 비교적 단신임에도 정돈된 말투와 제스처 그리고 중후하고 담백한 목소리까지 더해지면 내가 선호하는 멋진 슈트남의 자격요건을 두루 갖춘다.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가 자신이 공들여 만든 수많은 슈트를 허공에 날려 폭파한 이유는 자신에 완전하게 착 붙는 느낌을 주는 슈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걸) 그만큼 내게 맞는 양복을 찾기란 어렵다. 영화 <킹스맨>의 콜린 퍼스가 그 쭈글쭈글한 얼굴로 블록버스터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슈트 맵시 덕분이다. 그 멋진 옷을 입고 무례하긴 어렵지 않을까. 이런 잡생각을 하고 나니 여름이 저물어간다.


첫 월급의 상당 부분을 동생 양복을 위해 투자했던 형과 지난주 단둘이 밥을 먹었다. 그런 적이 없어서인지 꽤 어색한 자리였다.  그 시절 가산 디지털 단지에서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형이 낯설다. 못 본 새 얼굴도 붓고 뱃살도 늘었다. 우린 잘 안 보고 살지만 종종 그때 형을 떠올리다. 우린 별말 없이 헤어졌지만 내 옷장엔 아직도 형이 사준 정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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