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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09. 2019

아무것도 않고 허송세월

22살, 불판을 갈며


 빈둥대던 때를 기억한다. 아침에 책을 좀 읽고 저녁에 시원해지면 영화관을 들락거렸다. 아무것도 하릴없는 새벽 밤이라는 게 그리도 유려한 지 그때 알았다. 아마도 그쯤부터 훌훌 털어내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더딘 굴레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언제든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거리로 나설 수 있는 상태이기를. 당시 알바를 해서 모아두었던 은행 잔고는 짧은 연애와 함께 금세 바닥이 났다. 그래서 시작한 게 집 근처 고깃집 일이었다. 편의점이나 배달일은 보수가 적었고 한 달은 꼬박 채워야 했다. 고되게 일하고 하루하루 목돈을 타서 그걸 또 어딘가에 탕진하는 게 좋았다.

 여름이라 날도 더운 데, 손님이 늘 북적거리는 고급 식당에서 불판을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급이 칠천 원, 요즘엔 최저 수준이지만 당시엔 꽤 센 알바였다. 불판을 갈고 고기를 자르며 남 비위를 맞춘다는 게 날 위축시켰다. 주말에 스타벅스에서 육천 원짜리 캐러멜 마끼아또를 마시고, 오천 원짜리 케이크를 사 먹곤 했던 내 사치는 한 시간 중노동에 그림의 떡이 되었다. 그래도 폭염에 지칠 때면 같이 일하는 형과 식당 뒤편, 개집 앞에서 세상일에 대해 떠드는 게 낙이었다. 행복은 돈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공자님 말씀 따위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며 힐난하던 형의 꺼먼 얼굴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난 왜 아무것도 되지 않음에 절망했던가. 방탕하며 무목적의 단독자를 즐기는 데도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슬펐다.

 당시엔 돈이 생기는 대로 영화관에 바쳤다. 다행히 그 당시가 한국영화의 부흥기라 가는 족족 지금도 평생 잊지 못할 작품이 그득했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로 밤을 지새웠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봐도 성공률이 꽤 높았다. 쉬는 날엔 동네 카페에서 사장님이 추천해준 '무라카미 하루키', '미미 여사', '밀란 쿤데라', '폴 오스터'를 읽었다. 알바에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와 낡은 침대에 몸을 뉘고 어제 본 소설을 생각했다. 내 방 벽지는 이상한 문양이 잔뜩 있어 상상하기 좋았다. 블로그에 적을 몇 가지 문장을 떠올려보며 히죽히죽 웃었던가. 몽환에 젖어들 때쯤 열대야를 무릅쓰고 잠에 접어든다.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군대만 가면 되겠지 생각하며 마음 놓고 시간을 소모했다. 요즘 친구들은 어떠려나. 나와 비슷하지 않으려나. 정말 뉴스 앵커의 말처럼 학비와 취업 고민으로 삶을 견뎌 나가고 있으려나. 아마도 아니리라. 고된 상황에도 그들 역시 나름대로 제시간을 빈둥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고 뭔가 달라졌을까. 난 시급 대신 월급을 받고, 생활은 모자람이 없지만, 여전히 근근이 버텨낸다. 틈틈이 개봉 영화와 소설책을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지금은 저축을 조금 더 할 뿐이지 일상은 여전하다. 허튼소리에 반응하고, 누군가 날 쓸모없는 어른으로 여길까 봐 조바심을 낸다. 어떤 목표도 애써 도리질 치고, 심야에 손 세차나 하며 산다. 그렇다 여전히 난 머뭇거린다. 지금 이 허송세월을 떠나보낼 마음은 없다.


33살, 운전을 하며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는다. 답이 없는 강변북로를 버텨내는 건 라디오 덕분이다. 라디오가 여전히 유효한 건 그냥 틀어놓을 수 있어서다. 한 귀로 흘리고 딴생각해도 쉼 없이 울린다. 도시의 소음을 덮고 아늑한 기분을 준다. 라디오가 일본에 처음 보급되었을 땐 국민은 이 네모난 상자를 천황의 목소리로 생각했다. 제국은 통치력 강화를 위해 라디오를 활용했고, 민초는 일을 멈추고 절대자의 입 구멍을 바라봐야 했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아이들을 다잡고 모여 앉아 부러 높은 곳에 모셔둔 라디오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들을 떠올리며 양화진 공영주차장에 차를 댔다.


 합정역 부근 골목길 맑은 오후를 걸었다. 깊은 골목으로 들어서니 조용하다. 듣던 음악을 끄고 팟캐스트를 켰다. 어릴 적 내 어머니는 라디오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곤 했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녹음 버튼을 눌렀다. 때는 96년 수도권에 너나 할 것 없이 신도시 건설 바람이 불던 시절 우리 가족은 내 집 장만이라는 꿈을 이뤘다. 경기도 소도시 30평 아파트. 서울과 30분 거리에 흔한 복도식도 아니었으니 그때 부부의 기쁨은 오죽했을까. 가난한 공무원 아내로 악착같이 모아 장만한 그 집에서 그녀가 꾸었을 미래는 뭐였을까. 당시 아파트 부엌 수납함에는 난데없이 붙박이 라디오가 있었다. 아마도 무료하게 부엌일을 할 누군가를 위한 배려겠지. 문제는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어머니의 손이 잘 닿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라디오를 이리저리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선하다. 저런 걸 왜 붙여놨을까 싶지만, 당시 어머니에겐 내 집 마련의 근사한 증거였다. 자기 잔에 커피를 따르고 사과를 썰어 사 인용 식탁에서 라디오를 듣던 엄마. 매일 아침 아버지와 나를 밥해 먹이고, 그녀가 맞이했을 오후의 아늑함을 그린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방송은 새벽 한 시에 들었던 정지영이다. 단아하고 깨끗한 그녀는 내 질 좋은 수면을 위해 소곤거리며 누군가의 사연을 읽었다. 라디오는 음성을 머릿속에 형상화한다. 그건 어쩌면 낭만의 한구석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이야기가 되고, 조금 지나면 형형한 육체로 나타났다. 그토록 상냥했던 목소리와 렘수면에 접어들었다. 요즘은 유튜브로 개를 보며 잔다. 개를 키우지 않아도 녀석은 내 눈앞에서 무항생제 돼지고기를 씹는다. 녀석은 뭘 줘도 잘 먹는다. 댓글엔 앞다투어 개를 후원하겠다고 난리다. 다들 조그만 화면으로 개를 위한다. 그게 요즘엔 위안이다.

 집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어딘가 훼손된 어머니를 보았다. 아침에 어머니가 듣던 MBC FM 정은임 아나운서도, 저녁밥 먹을 때 이상한 음악을 틀던 배철수도 더는 찾지 않았다. 아파트를 떠나며 난 어떤 시절이 끝났음을 알았다.


사진 출처 : 영화 극장전, 전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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