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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21. 2019

누구든 돌진하는 이 세계로

참담

 08년, 일본 번화가 중 하나인 아키하바라 도로에 트럭 한 대가 날뛰듯이 이리저리 헤매다 고꾸라진다. 주말을 맞아 도로엔 수많은 인파가 관광과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트럭은 군중 속에 나타난 맹수처럼 맹렬히 인파를 향해 돌진했다. 몇 명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에야 멈춰 선 트럭은 거친 굉음을 토해낸 후에야 문이 열렸다. 트럭이 토해낸 것은 왜소한 체구의 남성이었다. 이 남자는 트럭에서 내린 후에도 행인에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른다.

 범인의 이름은 가토 도모히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25세 남성이었다. 그는 한 용역회사에서 단순 노무를 하다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우를 매일 인터넷에 올리며 억울함을 표했다. 처지를 비관하던 글은 어느새 공격적인 어조를 띄기 시작했고, 사건 당일에는 자신의 범행을 예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역시 묻지마식 범죄에 대한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편의점 종이팩에 청산가리를 주입하는 사건이라든지,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하는 테러도 같은 맥락 안에서 해석할 수 있다.


잠시

 16년, 뒤척이다 잠에서 깬다. 아직 컴컴한 새벽이다. 의식은 진즉 돌아왔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제 체육관에서 깜냥에 맞지 않은 쇳덩이를 들다 삐끗한 모양이다. 정작 잠자리에 들 땐 느끼지 못했는데 통증은 이제야 날 옭아맨다.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 얼마 남지 않은 수컷 기질이 옆자리 건아들과 경쟁을 부추긴다. 사뭇 느껴지는 미련함에 피식대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누군가가 날 찾기엔 느닷없다. 어떤 술 취한 놈이려니 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는 몇 번씩 벨을 누르다 이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나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요지부동이다.

 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려움을 느낀다. 어렸을 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밖으로만 도는 형은 늘 부재했다. 친구도 없고 요령부득하여 늘 혼자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김치 볶음에 밥을 해치우고 나면 오후가 나지막하다. 난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기분을 낸다. 컴퓨터를 켜고 삼국지 게임을 하고, 야한 비디오를 틀어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은 켜켜이 쌓여있다. 외롭진 않았다. 겨우 아늑한 고요에 가까웠다. 내가 두려웠던 건 오직 이 시간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불시에 문을 두드리면 얼어붙곤 했다. 난폭한 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별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저 지나가라 지나가라 되뇐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난 그가 거기 있음을 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숨을 죽이고 있다. 난 눈을 감고 한참을 기다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렌즈를 통해 문밖을 보았다. 키가 크고 얼굴은 시커멓다. 검은 외투에 가방을 들고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손에 우산이 들려있는 거로 봐선 밖에 비가 오는 모양이다. 순간 내가 문밖을 내다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두드림이 멈추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몸을 돌려 휑뎅그렁한 집을 바라봤다. 어제 읽다 만 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일상의 메커니즘이 교묘하게 뒤틀린 상태로 널브러져 있다. 언뜻 보면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지만, 분명하게 훼손되어 있음을 느낀다.


누구든 돌진하는 이 세계로

 19년,  이 세계에 사람은 태어나서 평범하게 죽는다. 물론 평범이라 부를 수 없는 죽음도 있다. 세상 그 무엇보다 더 고단한 제 삶처럼, 결코 무던할 수 없는 죽음도 있을 터다. 하지만 대체로 모두 비슷하게 죽는다. 내가 기억하는 특별한 죽음이란 기껏 문학에나 놓여있다.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 그저 평온만 바라고 무탈하기만 염원하다 맥없이 툭 끊기는 건가. 일시적 쾌락을 위해 돈을 모으고, 안정감이라는 허울뿐인 가치를 위해 하루를 희생하고 있나. 그저 사는 것 자체로 의미가 될 순 없을까.

 도시에 즐비한 아파트 숲을 지날 때마다 생각한다. 곳곳에 자리한 저 방엔 드러나지 못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어느새 확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난 글을 쓸 때마다 불행과 비극을 떠올린다. 태연한 표정 뒤에 숨겨진 속내를 상상한다. 각기 다른 불행은 그럴싸한 글이 되고, 난 고통의 우열을 나눠 평하기에 이른다. 난 다시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불행이 찬란히 돋보인다면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뭘까. 그의 도드라진 불행이 장렬히 고꾸라지면 난 뭘 느끼는 걸까.

 고유한 고통은 날 사로잡는 바가 있다. 치밀하게 직조한 플롯은 고통을 형상화해서,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한다. 가방 속에 담긴 비극은 내 삶이야 댈 것도 못 된다는 듯 욱신거린다. 누군가의 고통이란 먼발치에서 안전감을 느끼며 구경하는 비겁한 쓰라림이다. 그건 당연하면서도 서글프고, 욕이 불쑥 튀어나오는 기분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그의 통증이 다시금 잠잠해져 누구도 돌보지 않는 평탄한 삶으로 사그라들기를 바란다.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평범한 일상에 놓이길 바란다. 매일 아침 출근길이 고통에 겨워도, 파티션 뒤에 숨어 커피를 따르며 한숨 돌리길 염치없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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