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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15. 2019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누구나 처음을 상기하듯, 나 역시 종종 그해 여름을 떠올린다. 숨 막히는 더위에 신음하던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아파트 단지를 쏘다녔다. 딱히 갈 덴 없었다. 빈집은 싫었고 놀러 갈 만한 곳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놈의 피시방이라면 지긋지긋했으니까. 들끓는 애들도, 뮤턴트를 죽이겠다고 눈에 불을 켜는 꼴도 질색이었다. 아마 난 그때부터 뿅뿅뿅을 싫어했나 보다. 날 둘러싼 아파트 단지의 빼곡한 문들은 이 더운 여름에도 굳게 닫혀있다.

 그때 학교 도서관을 떠올린 건 순전히 에어컨 탓이다. 거기라면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겠지. 컴컴한 복도를 삐걱거리며 걷는데 적막이 흘렀다. 정적을 끼얹으니 등목을 한 듯 시원하다. 난 학교가 늘 힘들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시끌벅적함을 못 견뎠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가만히 있질 않는 애들 틈에서 어떻게든 혼자가 되려고 용을 썼다. 그러니 선생도 날 곱게 보지 않았겠지. 뭐든 같이 하기를 강요하는 통에 억지로 어울리는 척했다. 고개를 수그리고 두 팔로 빛을 가리며 이어폰을 끼고 엎드려 처 잤다. 그러면 좀 살만했다.

 복도 끝에 이르자 도서관 창으로 사서 선생님이 보인다. 수북이 담긴 녹차 티백과 잘 깎인 연필이 책상에 놓여있다. 격자무늬 블라인드로 빛이 들어오지만 눈이 부시진 않다. 신간 도서 목록을 정리하다 말았는지 책상 한옆에 책들이 쌓여있다. 늘 입던 청바지에 긴 머리로 얼굴을 감춘 그는 뭘 읽고 있을까. 쭈뼛거리며 아무도 없는 도서관 귀퉁이에 앉았다. 무심코 책을 하나 들고 왔는데 삼중당 문고에서 나온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어느새 다가와서 이 소설을 좋아하냐고 내게 묻는다. 입술이 근질거리고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뭐라 했더라. 잠든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늘 디디던 대리석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진다. 늘 걷던 복도를 스치듯이 지나며 생각이 또렷해진다. 학교 문을 나서자 오후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난 그와 책 얘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 러브레터


 사서 선생님을 향한 추억과 함께 내 기억 속에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건 도서대출카드다. 책 뒤에 꽂힌 도서대출카드는 최근엔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면 대출카드에 꼭 기록을 남겨야 했다. 그래서 카드만 봐도 어떤 사람이 대출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한 여름에 찾아간 도서관에서 추리 소설책을 빼들고 노란 봉투 속에 빳빳한 종이카드에 내 이름을 새기고 책을 들고 나오던 시간을 그립다. 이런 도서대출카드에 관한 추억을 다룬 영화도 있다. <러브레터>는 도서대출카드가 만든 인연이 긴 세월을 거치며 우연을 타고 다시 찾아오는 마법과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주인공 히로코는 죽은 남자친구 후지이가 그리워 그의 고등학교 시절 집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근데 놀랍게도 남자친구 이름으로 답장이 온다. 영문을 알고 보니 죽은 연인과 고등학교 시절 동창이자 동명이인인 여자 후지이가 답장을 한 것이다. 히로코는 후지이에게 학창 시절 그에 대한 기억을 생각나는 대로 알려달라고 조른다. 그렇게 편지를 통해 그에 관한 기억들을 주고받으며 영화는 덤덤하게 흘러간다. 

 남자 이츠키는 늘 빈둥거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책 도서카드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게 취미인 녀석이었다. 그에 관한 기억은 죄다 불쾌한 것뿐이라 별다른 말을 할 게 없다고 여자 이츠키는 말한다. 다만 오직 하나의 기억은 남다르다. 그녀가 가족상을 다해 학교를 못 나올 때 남자 이츠키가 불쑥 그녀를 찾아온다. 책 한 권을 들고, 대신 반납해달라며 퉁명스러운 말을 남기고 떠난 녀석. 이때 건네받은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그 후 남자 이츠키는 전학을 가버리고,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한다. 

 여자 이츠키는 옛 추억이 떠올라 오랜만에 다시 고등학교 도서관을 찾는다. 그 시절의 추억이 몸을 감싸고, 시간의 경과를 몸소 느끼며 회상에 젖는다. 며칠 후 이츠키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도서관에서 만났던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녀석들은 그녀에게 덥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을 내민다. 남자 이츠키가 그녀에게 반납해달라고 했던 그 책이다. 그리고 책에 꽂힌 독서카드를 보니 학창 시절 여자 이츠키 자신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살아가다 보면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땐 종종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일상의 커다란 구멍을 마주하고도 미처 돌아볼 새 없이 스쳐 지난다. 늦은 밤 뭔가가 떠올라 기억을 물끄러미 응시하지만, 머리가 아득해 눈꺼풀만 무겁다. 언어는 애초에 불완전해서 마음을 온전히 녹여낼 수 없다. 이런 우리를 위해 어떤 영화는 창밖으로 멀리 어두워지는 늦저녁 하늘처럼 불가해한 현상을 서술한다. 내가 정체 모를 기분에 허우적거릴 때 어떤 이야기는 날 문학의 자장으로 이끈다. 미묘한 느낌을 놓치지 않고 광채를 띤 순간을 포착한다. 영화 <러브레터>는 기억 속 그런 광채에 관한 영화다. 도서관이라는 로맨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공간에서도 낭만은 깃든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오래전 그날을 떠올린 데는 시인 박준의 영향이 컸다. 며칠간 야금야금 그를 읽으며 지나긴 시간을 떠올렸다. 그가 쓴 시구들은 과거 한 귀퉁이에서 건져 올린 것이었고, 난 그로 말미암아 내 누추한 기억에 손댈 용기를 얻었다. 내일의 나를 만드는 건 결국 내가 미적거리는 과거라는 걸 생각했다. 내가 머물렀던 기억이 아무런 영향 없이 흩어져 있다고 인정하긴 어렵다. 그렇게 인정해버리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난 어떻게든 내 과거에 미사여구를 붙여 뭔가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글을 쓴다. 전엔 그게 억지처럼 느껴졌는데 요즘엔 다들 그렇게 훼손된 무언가를 덧칠하며 산다고 이해한다. 박준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가 과거를 돌보는 바에 내 멋대로 안심했다.

 박준이 기억하는 그해는 별거 아닌 일들이 스치지만, 심심한 어조로 쓴 그 시간이 읽고 보니 애틋하다. 그땐 그저 버티기만 했던 것들이 지금은 필터에 끼워져 그럴듯하다. 덧없는 위로를 바라며 윤색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뭐 어떤가.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눈앞에 쏟아지는 일들은 녹록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다 웃어넘겨버릴 일이라고 믿지 않으면 고단하다.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해가 내 생에서 가장 밑바닥이었기 때문이다. 가정과 가족이, 친구와 터전이, 켜켜이 등진 미래가 날 흐드러지게 밖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오늘 박준을 읽다 그때를 떠올려보니, 그 시간 또한 추억처럼 아련해진다. 샐린저를 핑계 삼아 그럴싸한 감정을 꾸민다.

 시집의 말미엔 신형철 평론가가 박준에 대해 적었는데 그 역시 시더라. 마치 피처링하는 가수가 원곡자를 넘어서듯, 신형철은 해설을 통해 얇은 시집에서 제 지분을 확보한다. 이러다 여차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해설은 박준의 시를 더 돋보이게 함은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해설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이 된다. 난 늘 예술작품에 관해 말한다는 핑계로 글을 써왔다. 그게 때론 비겁하게 누군가의 명성에 숨어 글을 쓴다는 자괴를 불렀지만, 신형철을 읽을 때면 예술에 관해 발언하는 그 자체에도 길이 있음에 안도한다. 그가 쓴 정확한 칭찬에 찬사에, 말 그대로 미사여구에 감복한다.


사서 선생님을 따르게 한 건 부러움이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정확히는 그의 저변에 끌렸다. 그는 책에 싸여 낙관적이었고, 세상 근심을 종이 더미에 휘발했다. 난 그를 보며 훗날 책 곁에 사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꽤 긴 시간 내 꿈은 도서관 사서였다. 책 냄새를 맡으며 기억을 그럴듯하게 적고 다시 종이를 만지는 삶.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퇴근하면 다 괜찮아져, 카페에 가서 책을 펴면 족하다. 이 시기만 넘기면 된다고, 대충 수습하고 소설로 도피한다. 다 끝나고 혼자 있을 수 있다면 그뿐이다. 그렇게 타이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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