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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07. 2019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데

시집 <책기둥>, 문보영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지금이 몇 시인지 말하는 것일까(p81, 과학의 법칙)

 빨래는 여러모로 귀찮다. 독거하는 난 빨랫감이 적어도 늘 세탁이 버겁다. 좀 더 있다 해야지, 오늘 입은 옷만 더러워지면 해야지, 하다가 속옷 함이 텅 빈다.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지.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어려울 게 있나 싶지만, 반평생 빨래를 하신 어머니도 여전히 지긋지긋해하시는 걸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세탁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땐 노동이 줄어들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생은 갖춰질수록 더 부산스럽기 마련이다. 과거엔 며칠씩 입던 옷을 요즘엔 한 번만 입고 빤다. 얼룩이 조금만 묻어도 가차 없이 벗어젖힌다. 난 잦은 빨래와 빈번한 건조의 세상에서 쿰쿰한 냄새를 피운다. 오늘 아침에도 세탁 통을 앞에 두고 뭘 섞어 빨지 말라고 했는데, 뭘 손빨래하라고 했는데 골몰하다 어제 입은 옷을 다시 걸치고 집을 나섰다.

 딱히 가고 싶은 데가 떠오르지 않아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각까지 딱 세 시간 남았다.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을 읽으며 뭔가 써보려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에스프레소를 손가락에 끼고 근사한 척했다. 다리를 꼬고 창밖을 보니 그리운 시절이 떠오른다. 좋은 날씨를 핑계 삼아 쓸데없이 시간을 되감았다.

 작년 한 해 동안 무수한 유럽 국가를 여행했다. 그렇다고 하루하루가 빛처럼 빠르게 흘러갔을까. 아니 그렇진 않았다. 지금도 눈에 선한 유려한 도시를 걸었으나 결코 시간은 날 앞서가지 않았다. 여행은 과다한 정보 유입 탓에 의식을 팽팽한 긴장으로 내몬다. 시간은 평소답지 않게 조금 뒤처져선 손을 훠이훠이 젓는다. 낯선 저녁거리에서 두리번거리고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을 들고 갸우뚱하면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흐른다. 여행은 시간을 늦추고 찰나를 각인한다. 난 여행의 가치를 그렇게 이해한다.

 여행이 시간을 몸소 체감케 한다면, 책은 시간을 확장한다. 늘 새로운 신간을 사들여 첫 장을 펼 때마다 부담을 느끼면서도 기어코 책을 놓지 않는 것도 확장에 쾌감에 기인한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읽으면 갑갑한 일상에 숨통이 틘다. 일터에서 온 힘을 빼고 퇴근해서도 졸음을 참으며 책을 읽는 건 내 생에 결코 누릴 수 없을 시공간을 접하기 위해서다. 생을 이탈하는 독서라는 체험은 굳이 오슬로에서 청어요리를 먹어보지 않아도, 스위스 시계 산업 장인과 직접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타인의 삶에 닿을 수 있다. 문학은 누군가에게 무용할지 몰라도 적어도 세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쓰임새를 가진다. 현실의 지리멸렬한 좌표평면에서 벗어나 허구라는 시간 축에 서면 생은 입체적인 모양을 드러낸다. 엄연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시쓰기는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파리의 가능한 여름)

 파리 시내 여행을 할 때 마르모탕 미술관을 구경했다. 순전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막상 그림을 마주하자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서 본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흥을 가졌다. 실물이 가진 양감과 질감은 미술관이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무수히 걸려있는 그림을 보면 화가는 죽어도 작품은 여전히 생명을 가지고 있음에 감동한다. 모든 게 소멸해도 예술만은 그 자리에 건재하다. 1872년 모네는 이 그림을 그리며 작품이 가닿을 여파를 떠올렸을까. 서울 한 구석진 카페에서 잡념에 빠진 한 청년에게 자신이 그린 아침 풍광이 닿을 줄 알았을까. 지금 이 시각에도 전 세계 무수한 이가 인스타그램으로 모네의 그림에 해시태그를 붙인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은 덧붙여 전 세계 여행자의 필수 코스로 자리한다. 희미한 새벽 햇살이 한 남자를 호위하는 사각 틀 속 시간은 영원을 거닌다. 다시 말해 예술의 본질은 시간을 붙잡는 것이다. 문학은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밤의 낭만을 선사하고, 허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서서 본 그림에선 박제된 시간을 본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금쪽같은 주말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 )에게만 없고 모두에게 허락된 무엇이었다(p47, 얼굴 큰 사람)

 연애란 결국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다. 하루는 24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충전되지만 늘 모자라다. 누군가에게 이 짧은 하루를 떼어 선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렇지만 날 바라보는 눈을 외면하긴 어렵다. 보채는 말투에서 모든 갈급함이 사그라진다. 그럴 땐 시간이 한없이 도드라진다. 전에 없던 다정한 마음에 스스로 놀란다. 난 내 부족한 시간을 쪼개 그에게 선물한다. 잘 안되지만,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다. 살면서 무수한 계획이 틀어졌다. 내가 바랐던 삶이 아니라는 자각은 출근길에 명확히 드러난다. 어느새 꿈이라는 말은 낯 간지러운 소리로 들린다. 귀를 후비며 시니컬함을 무기 삼아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며 짐짓 쿨한 척하지만, 패배감은 비어져 나온다. 연애는 내가 오로지 실현 가능한 바람이다. 온기에 감격하고 시간을 끝없이 의식하게 하는 유일함이다. 냉혈한 내가 손을 비비고 적을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의 보이는 상처 (p33, 지나가는 개가 먹은 두 귀가 본 것)

 청바지를 사려고 유니클로에 가면 한 뼘 넘게 잘라내야 한다. 왜 이리도 많이 잘라야 할까. 옷은 왜 말도 없이 길어질까. 난 여전히 평균치를 향해 바동거리지만, 턱도 없다. 대학 시절엔 온갖 빨랫감을 너나 할 거 없이 세탁기에 처넣고 건조까지 단번에 끝냈다. 옷이 커도 그냥 입고, 해져도 빈티지라고 우겼다. 시간을 물처럼 쓰면서 한없이 낙관적인 미래를 그렸다. 나이를 먹으며 비싼 옷이 많아졌다. 손빨래, 드라이클리닝, 다림질이 필요하다. 세탁소를 가는 것도 일이다. 어차피 더러워질 걸 비싼 돈 주고 맡겨야 한다. 세탁소는 시간을 아끼는 덴 좋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우리 동네 세탁소 아저씨는 왜 물빨래해도 되는 걸 가져왔느냐며 통박을 한다. 이런 것까지 나한테 맡기냐는 표정이 날 위축시킨다. 아저씨는 내 대답은 들을 생각도 않고 신용카드를 뺏듯이 가져간다. 아저씨는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한 청년을 쥐 잡듯 잡는다. 종이처럼 구겨진 표정으로 달달 볶는다. 귓전에 울리는 4옥타브 미 데시벨 목소리에 마음이 참혹해진다. 내가 세탁소를 이용해서 아낀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혈혈단신 한국으로 와 영문을 알 수 없는 동네에서 정체 모를 욕을 먹는 친구의 이름은 뭘까. 그는 이 시간을 나중에 어떤 마음으로 기억할까. 난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 근처 지하철역으로 바삐 걸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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