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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09. 2019

자나 깨나 끼니 걱정

 난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갑작스럽게 위기가 닥쳐와 가족을 궁지에 몰았다. 쭉 가난해 온 것과 어느 순간 가난해진 건 다르다. 가난이 침범하면 충격의 여파는 더 오래가고,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무엇보다 집이 좁아지고 곁을 지키던 가구가 버려진다. 손때 뭍은 물건이 사라지면 마음이 황폐해져 늘 목이 마른 기분에 시달린다. 가난을 받아들일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아마 일을 하기 시작하며 덤덤해졌던 것 같다. 사회에서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는 느낌에 가난은 짐짓 희미해졌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며 종종 가난을 의식한다. 퇴근 후에 자취방에 들어서면 누추한 세간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쿰쿰한 냄새가 나고, 그럴싸한 가구도 없어 휑하다. 그래도 울적한 기분이 들기보단 이 서울 바닥에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 위안을 삼는다. 비록 비좁아도 몸을 눕히고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오직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끼니'다. 간편해서 찾는 편의점 도시락은 기분을 처지게 한다. 짜고 맵고 기름져 배불리 먹어도 늘 입이 텁텁하다. 이젠 익숙해질 만하지만 가끔 속이 더부룩해 소화제를 찾는다. 차가운 밥알을 씹으면 개운하고 정갈한 맛이 그리워 폰으로 ‘한국인의 밥상’을 찾아본다. 비록 자그마한 화면이라도 갓 지은 밥과 펄펄 끓는 된장찌개가 눈에 들어오면 주체할 수 없이 허기가 밀려온다. 혼자 대충 때우는 끼니는 초고속 디지털 기술도 가닿지 못한 사각지대다. 그건 일종의 감정적인 여파라 잘 복구되지 않는다. 식탁도 없는 집에서 인스턴트 밥을 먹다 보니 끼니때마다 가난이 기웃거린다.

 혼자 사는 난 매일 끼니 걱정이다. 아침 챙겨 먹을 생각은 꿈도 못 꾸고, 퇴근 후에 저녁을 때우기 급급하다. 잘 먹고 싶은데 늘 부실한 상차림에 몰린다. 영양과 그럴싸한 기분은 포기한 지 오래다. 최소 시간과 노력으로 먹고 치우는데 익숙해졌다. 배달 음식을 시키고, 설거지 시간이 아까워 그릇에 담지도 않고 서서 먹는다. 일회용 젓가락은 허기를 달래기 급급하다. 가끔 외식하러 나가도 혼자라는 인식에 시달린다. 고독하다는 것은 허기와 같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오붓한 저녁을 감각하는데 나만 굶는 것 같은 기분이다. 식당 가득 바삐 대화를 나누는 가족과 연인이 눈에 들어온다. 어색하고 신경이 곤두서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밖으로 드러난다. 나만 혼자라는 사실이 도드라져 눈치 주는 사람이 없어도 눈치를 본다. 고독한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된다. 혼자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게 괜스레 눈치가 보여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문하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지긋지긋한 라면과 통조림을 여전히 가까이 둔다. 궁상맞지만 맘 편히 끼니를 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두 시간씩 저녁을 즐긴다는 프랑스인이 보면 기겁할 테지만, 난 바쁜 하루를 핑계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산다. 나는 이런 기분이 내가 30대 중반을 넘어선 독거남이라는 사실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이 도시에서 내 나이까지 혼자 산다는 것은 늘 누추한 냄새를 품고 사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정성스럽게 잘 살고 싶은데 끼니 때문에 혼자를 의식하게 된다.

 한 달에 한 번쯤 부모님 댁에 가면 어머니가 날 위해 상을 차려주신다. 독립한 지 오래라 내 방은 사라졌지만, 상차림은 여전하다. 어머니를 식탁에서 마주하면 내 오감이 먼저 반응한다. 찌개가 끓는 냄새만 맡아도 온 세포가 일제히 봉기한다. 네 가족이 모여 앉아 숟가락을 냄비에 넣고 찌개를 퍼먹는다. 익숙한 요리가 목구멍에 들어가면 몸이 뜨거워지고 금세 기운을 차린다. 맛도 맛이지만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가족을 보면 마음이 아늑해진다. 각기 제 숟가락만 보며 별말 없이 먹기만 하는데도 가족이란 역시 식구임을 깨닫는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가진 위안이 있다.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 가면 이제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떠벌리지만, 어머니가 호박과 두부를 넣고 끓인 구수한 된장국을 비우며 난 바닥난 낙관을 충전하곤 한다.


 내 기억에 어머니는 남이 차려준 음식을 마음 편히 대접받은 적이 없다. 어머니의 젊음은 내내 가족 밥만 차리다 끝이 났다. 특히 명절이 되면 온갖 제사 음식 때문에 소중한 휴일을 날린다. 그 지긋지긋함. 누가 쥐여준 의무도 아닌데 단 한 번도 어기지 못한 관례의 답습. 직접 재료를 사고 부치고 그릇에 올려야 하는 부단함. 무엇보다 뼈아픈 건 그걸 당연하게 아는 가족의 뻔뻔함이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처럼 힘 빠지는 일은 없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제사 음식에 진저리치신다. 종일 기름칠을 하고 나시면 탐스러운 명태전도 입에 안 대신다. 아들이 명절을 쇠고 집을 떠나고 나서야 못내 버리기 아까워 남은 음식을 데워 드신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혼자 먹는 음식이 맛있을 리 없지만, 내가 그런 기분을 짐작할 수 있을 때까진 꽤 긴 시간이 흘러야 했다. 녹슨 자취방에서 조악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서야 어머니의 시간에 겨우 가닿았다.

 어머니는 집밥 외엔 잘 모른다. 부모님과 유럽 여행을 가서 고풍스럽기로 유명한 프랑스 레스토랑에 모신 적이 있다. 손이 후들거리는 값비싼 요리를 대접했지만, 어머니는 잘 드시지 못했다. 난 짜증이 나서 좀 더 드셔 보라고 통박을 했다. 요즘 핫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도 조금 깨작거리다 손을 놓으신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서 식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드신다. 나이가 들면 음식에 대한 취향도 보수적으로 변한다는데, 생전 입에 대지도 않던 음식이 하루아침에 기꺼울 리 없다. 반면 평생을 직장에 다니신 아버지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스파게티와 샐러드도 잘 드시는 아버지는 회사 근처에서 이런저런 음식을 사드셔서 바깥 음식에 익숙하다. 어머니는 외식을 낭비로 치부하고,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생각하면 즐기지 못한다. 취향이 없다 보니 아들이 좋다고 하면 억지로 따라나선다. 난 어머니가 빼앗긴 일 인분을 찾지 못해 속상하다.

 어머니의 음식 중에 가장 좋아한 건 삼겹살 구이다. 신문지를 펼치고 바닥에 큰 불판을 꺼내 놓는다. 형과 나는 상추를 씻고, 각종 김치를 냉장고에서 꺼낸다. 된장찌개도 냄비 받침 위에 올리고, 무려 두 근도 넘는 삼겹살을 굽기 시작한다. 금수처럼 달려든 우리 형제는 아직 다 익지도 않은 고기도 먹는다. 뭐가 그렇게 뿌듯하셨는지 어머니는 배불러 더는 못 먹겠다는 두 아들을 위해 고기를 굽고 또 구웠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만찬이다. 텔레비전엔 평일 저녁 예능이 나오고, 삼겹살을 싫어하시는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흔적도 없이 그릇을 치운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과일을 깎고 계신 어머니를 보고 질겁을 한다.

 내가 중학교 무렵에 어머니가 자그마한 가게를 차렸다. 자식 키우느라 다니던 직장도 치우고, 오랜 시간 일을 안 하던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큰 맘먹고 시작한 일이다. 그 결과 내 밥상은 무척 부실해졌다. 아무리 신경 쓴다고 하시지만, 가게 일이라는 게 힘에 부치고 신경이 곤두서 음식은 갈수록 단출해졌다. 그 시절 지겹게 먹던 음식이 돼지고기 김치 볶음이다. 제육과 달리 기름지지 않아 잘 질리지 않고(그래도 질리고야 말았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겨 군침이 돈다. 그땐 다른 반찬 좀 해달라고 졸랐지만, 지금은 그 맛이 그립다. 방과 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마주한 빈집과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아늑한 풍경이 떠오른다. 고소한 김치 볶음 냄새와 밥풀떼기가 뭍은 밥솥이 자리한 부엌엔 어머니가 붙여놓은 메모지가 그득하다. 우선 뼈를 고아 끓인 흰 고깃국을 데우고, 김치 볶음을 약한 불에 데운다. 밑반찬을 통째 꺼내 열고, 밥을 왕창 떠서 식탁에 놓으면 식사 준비 끝. 급하게 먹고 나면 설거지는커녕 식탁을 치우지도 않고 방치한다. 날 버리고 일을 하러 간 어머니를 향한 원망을 담아 식탁을 더럽힌다. 혼자 먹는 밥이 고약하다는 걸 안 게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늘 분주하고 빡빡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부엌이 그 시기엔 그렇게 한산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미역국을 자주 드셨다. 한 솥을 끓여놓고 매 끼니 찾았다. 늘 입맛이 없다며 국에 밥을 쪼금 말아 한술 뜬다. 나와 형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매일 같은 국을 먹는단 말인가. 우리 형제가 좋아한 건 김치찌개와 육개장 같은 매운 국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 식탁엔 자식 위주 반찬을 꺼내놓고, 우리가 다 먹으면 홀로 식탁에서 펄펄 끓인 미역국을 드셨다. 어머니는 짜장면을 싫다고 하셨어, 같은 구슬픈 일화가 아니다. 어머니의 미역국은 지금도 유효한 그녀의 인생 음식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한, 맑고 정갈한 그녀에 걸맞다. 내게 미역국은 좋든 싫든지 간에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소울푸드가 되었다.


 98년, 수도권에 너나 할 것 없이 신도시 건설 바람이 불던 시절 우리 가족은 내 집 장만이라는 꿈을 이뤘다. 경기도 소도시 30평 아파트. 서울과 30분 거리에 흔한 복도식도 아니었으니 그때 부부의 기쁨은 오죽했을까. 찻잔에 커피를 따르고 사과를 썰어 사 인용 식탁에서 라디오를 듣던 엄마. 매일 아침 아버지와 나를 밥해 먹이고, 그녀가 맞이할 오후의 아늑함이 눈에 그려진다. 가난한 공무원 아내로 악착같이 모아 장만한 집에서 그녀가 꾸었을 미래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움츠러든 그녀가 떠오른다. 집에 위기가 닥쳐 어딘가 훼손된 어머니를 기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라디오로 듣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사라진다. 얼마 후 아파트를 떠나며 난 어떤 시절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아마 그때부터 어둡고 침침했던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어머니의 얼굴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당치 않은 원망에 혼자 살기를 염원하며 밖으로 돌았다.

 더 짙은 후회가 쌓이기 전에 더 다양한 음식을 어머니와 함께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집을 떠나서도 매일 내 끼니를 염려하던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바다. 더 많은 곡진한 상차림이 어머니의 여생과 함께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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