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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4. 2019

여전히 소년을 잊지 못한다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

<빌리 엘리어트>는 비디오로 본 영화다. 01년이니까 집에 엄연히 VHS가 있었고, 대여점이 떡하니 동네 상가에 자리했다. 부엉이가 그려진 그 가게를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비디오와 탁자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 동네 아저씨들. 난 요즘도 도서관에 빼곡한 책을 보면, 그 시절 비디오 가게의 무수한 영화들을 떠올린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의 아득함 뒤로, 미처 보지 못한 필름에 대한 경애의 마음. 그렇게 책과 영화는 내 여가를 잠식했다.

우선 가게에 들어서면 신작 코너에서 빌빌대다가 붉은색 자동차 형태의 반납기에 비디오를 꽂으면 휘리릭 되감기가 된다. 아저씨 연체료는 좀 봐주세요. 저 단골이잖아요. 근데 <미션 임파서블 2>는 왜 반납이 안 되나요. 가게 구석엔 포스터가 가득 담긴 상자가 있다. 당시 <코르셋>이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내 방 한쪽 면에 붙였다가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비디오를 까만 봉지에 넣고 가게를 나서면 홍상수처럼 느슨한 남방을 입은 아저씨가 벽면에 최신 포스터를 빈틈없이 도배한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홍보문구와 눈부시게 촌스러운 19금 포스터. 누군가 영화에 관한 원체험을 묻는다면, 난 영화 그 자체가 아닌 비디오 가게 풍경을 떠올린다. 나른한 주말 아버지와 라면을 먹으며 보았던 영화들은 다 거기서 나왔다.

잘 생각은 안 나지만 당시 <빌리 엘리어트>는 피해야 할 부류였다. 딱 봐도 지루해 보이는 포스터에, 나시와 반바지 차림 소년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내 반대에도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이 영화를 골랐다. 와 우리 아버지 거추장스러운 홍보문구에 속는구나. 당시 내 생각에 내세울 거 없는 영화들이 구구절절 설명 많았다. 온갖 수상 목록을 포스터 새겨서 눈속임했다. 비슷한 경우로 <제8요일>이라는 영화도 이름 모를 상을 많이도 받았던데 지독하게 재미없었다. 아버지 또 속지 말아요. ‘톰 크루즈’ 나오는 영화에 수상 내용 있는 거 봤어요? ‘캐서린 제타존스’ 나오는 영화에 그녀의 몸매 말고 필요한 게 있던가요. 난 아버지의 구린 취향에 불평을 터뜨리며 이 영화를 일요일 오후에 봤다.


납득 가능한 해피엔딩


소파에 모로 누워 영화를 보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특히 소년의 처지에 몰입했다. 영화 시작부터 빌리는 침대에서 프레임 바깥으로 솟구칠 정도로 높이 뛴다. 벌건 양 볼에 환희에 찬 표정으로 천국에라도 닿을 듯이 거침없이.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더러운 방과 성질머리 고약한 형의 욕설이 몽상을 깨뜨린다. 엄마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무심한 아버지는 권투나 하라며 글러브를 던지지만, 소년은 주먹을 휘두르는 게 죽기보다 싫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데 빌어먹을 세상은 도움이 안 된다. 특히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나 역시 빌리처럼 당시에 기술이나 배우라는 부모님과 내 취향을 무시하는 담탱이가 싫었다.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은 근처 시립도서관 사서 누나뿐이었다. 나가서 좀 놀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방구석에서 빌빌대던 시절, <호밀밭의 파수꾼> 문고본을 읽는 그녀는 내 선망을 독차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 고민은 1인분을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절망이었다. 다 한통속처럼 비슷한 어른이 되라고 강요했다. 한 스무 살쯤 되면 장밋빛 전망이 기다릴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 이게 아닌데' 싶었다. 내 취향은 암울한 미래를 부르는 헛짓거리였고, 학교와 부모가 원하는 건 다 내 혐오를 불렀다. 아, 이래서 애들이 다 입영통지서에 입을 삐쭉 내밀고 말도 없이 수긍하는구나. 형 민증으로 호프집에서 생맥이나 때리고 되지도 않는 일갈을 하는구나.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온몸을 비틀며 바닥과 벽을 치는 빌리의 춤에 빠져들었다. 분노를 춤에 실어 온 동네를 쏘다니는 녀석이 좋았다. 그래 저렇게라도 흔들어 재끼면 속은 시원하겠네. 기껏해야 동네 피시방으로 피신하는 나와 다르게 두드리고 깨지면서 기어코 끝을 보는구나. 영화는 마치 위인전처럼 국립 발레단 대표 무용수가 된 빌리를 비추며 막을 내린다. ‘백조의 호수’에서 우아하게 비상하는 녀석을 상기한다. 앵 느닷없이? 좀 작위적이네! 갸우뚱하다가도, 그래 영화는 해피엔딩이 맛이지. 대리만족에 빠져선 녀석을 한껏 대견스럽게 추켜세웠다.  

대처리즘과 아버지


근데 이 영화를 직장인 10년 차,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 하늘 퇴근 후에 보니까 달리 보이더라. 이제 빌리는 잘 안 보이고 아버지가 눈에 들어온다. <빌리 엘리어트> 배경은 영국 더럼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우리로 치면 강원도 태백쯤 되려나. 철의 여왕이라 불렸던 ‘대처’ 시절, 탄광 투쟁은 세계적인 화두였다. 진압하려는 정부와 산업 사회의 기틀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던 노동자의 투쟁. 그 과정에서 25만 명의 광부가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 사회의 면면과도 멀지 않은 광경이다. 격렬한 파업 장면을 보면 이 영화가 ‘켄 로치’의 영화가 아닌지 눈을 비비게 된다. 영국인은 80년대 중반 탄광 노동자의 파업에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노동자를 박해해서 받아낸 명세서엔 현재의 ‘브렉시트’가 마주한 고민이 담겨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굳이 빌리의 일상에 녹이지 않는다. 소년에겐 그저 분홍색 토슈즈와 우아한 몸짓이 전부다. 크리스마스에 궁상맞게 울던 아버지는 땔감이 없어 어머니가 남긴 피아노를 깨부수고, 노조위원장인 형이 축구나 하라며 몰아세워도 어쩔 수 없다. 팍팍한 현실과 소년의 꿈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니까. 마치 십 년 전 내가 그은 밑줄이 생경하듯, 세대가 믿는 가치는 변모한다. 후기 산업사회는 저물었고 이제 끼니 걱정이 없어진 다음 세대는 로큰롤을 들으며 마리화나를 피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 영화는 아버지에 무심하다.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게 어쩐지 쑥스럽고 좀스럽다. 어른을 꼰대라 칭하는 게 익숙해진 시대에 부성은 먼지 나는 소재다. 개인주의 시대에 혈연이란 어쩐지 심심하다. 가슴에 들끓는 소용돌이에 견딜 수 없다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 자존심을 포기하는 아버지. 배신자 낙인을 각오하고 일을 하러 버스에 탄 노동자의 속내. 아들은 어렵사리 오디션에 합격하지만, 그 학비를 위해 다시 탄광에 서야 하는 남자. 담담하지만 끈질기게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 <빌리 엘리어트>의 절정은 빌리의 비상이 아니다. 광부들이 정부에 투항하는 날에 국립발레단 합격통지서를 받는 그 순간이다. 그놈의 희생, 그놈의 먹고살기 이제 지겹다 지겨워.

Hallam Foe, 2007

빌리를 연기한 ‘제이미 벨’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애틋한 경험이다. 나와 생일 한 달 차이 나는 녀석의 필모그래피를 조용히 지켜본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열병에 빠진 청년(할람 포), 성공과 현실의 타협에 분리되는 자아(필름스타 인 리버풀)는 유독 도드라진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가졌던 아련함은 전적으로 빌리를 위한 소고다. 제이미 벨에게도 꿈만 같던 20대는 스쳐 지나갔고, 새벽 쓰레기차처럼 덜컹거리는 30대가 왔다. 무대 뒤에서 호흡을 고르는 ‘빌리’의 성장이 뭉클한 만큼, 데뷔작이 달아놓은 꼬리표에 아랑곳없이 머리를 꼿꼿이 세운 체 고유한 리듬을 유지하는 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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