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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8. 2019

그들 각자의 사무실

스포트 라이트, Spotlight, 2015

’09년 뉴욕, 추운 겨울날 허드슨강에 여객기가 불시착한다. 기체가 새 떼와 충돌한 탓에 엔진이 다 타버린 상태였다. 추락 직전 관제탑은 회항을 명령했지만 노련한 기장 ‘설리’는 이를 어기고 뉴욕 한복판으로 조종간을 튼다. 승무원의 침착함과 해양구조대의 즉각적인 대처로 모두 무사했다.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미정부는 이를 사고로 규정한다. 미국 교통안전위원회는 조종사를 비롯한 비행 과정 전체를 치밀하게 조사한다. 그들은 기적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설리가 시스템을 이탈해 생긴 위험도를 측정한다. 한 개인의 영웅적 행위에 도취하기보단 시스템을 진단하는 수고다.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16년 말에 개봉한 작품이다. 여전히 대참사의 여파에 시달리던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난 미국 사회하면 총기 소지와 부패한 물질주의를 떠올린다. 탐욕스럽고 제멋대로인 합중국은 고고한 유럽과 달리 천박하다. 하지만 <설리>를 보고 나면 미국이 인류에 기여한 바를 깨닫게 된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는 자유를 향한 예찬이다. 그들은 이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시스템을 구축했다. 미국은 기적과 온정을 믿지 않는 집단이다. 영화는 면밀한 개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빈틈을 메우는가에 집중한다. 그들의 주도면밀함은 명백한 우월이며, 눈꼴 실 정도로 아름답다.


’02년 보스턴, 지역 성직자가 30여 년간 수많은 아동을 성추행한 혐의에 몰린다. 하지만 가톨릭 교구는 쉽사리 사건을 무마한다. 지역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는 새로운 편집장을 기점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지역사회 카르텔이 한 언론사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차분하게 훑는다.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언론사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신화다. 요즘엔 사실관계 확인 없이는 기사 한 줄도 믿기 어렵다. 트래픽 전쟁에 날조한 보도가 낭자하다. <스포트라이트>는 <설리>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제는 먼지만 쌓인 언론윤리를 들춘다. 영화 속 기자는 점진적 취재를 통해 진실에 접근한다. 저널리즘이 사회 문제를 취재하고 공공의 논의에 회부한다. 편집장은 신부 한 사람이 아닌 교회를 겨냥하고, 기자가 보도를 밀어붙여도 팀장은 체계를 잡으라고 타박한다. 감정을 배제한 채 먹잇감을 향해 다가간다. <설리>가 미국이라는 시스템을 조망한다면, <스포트라이트>는 미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의 구현 방식이다.

영화는 형식에서 두드러지는 바가 없다. 스타일을 누르고 지반을 다져 연출이 평이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저널리즘’ 그 자체기 때문일 것이다. 취재진의 멈추지 않는 움직임은 진실 추구의 부속물로 기능한다. 그 누구도 도드라지지 않고 궤도를 돌며 직무와 맞물린다. 마치 볼트와 너트가 맞춰지듯 정갈하다. 영화는 정점은 폭로의 순간이 아니다. 신문이 인쇄되고 포장되어 트럭에 실린 채 신문사를 떠나는 순간이다.


’19년 서울, 출근길에 어제 본 영화가 떠오른다. <스포트라이트>의 탐사보도 팀 사무실의 친숙한 정경. 추레한 옷을 걸친 그들은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다. 전화가 바삐 울리고 글자가 모니터에 빼곡하다. 비단 언론사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사무실에서 비슷한 아침을 맞는다. 파티션을 벗 삼아 메일함을 열며 커피를 따른다. 관성으로 말미암은 일과의 연속. 침묵을 선호하는 마음으로 맞는 회의. 업무 곳곳에 파헤치고 뒤엎지 못한 관행이 즐비하다. 하지만 퇴근을 위해 묵힌다. 고민 없이 흘려보낸 선택은 불현듯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찾아온다. 미세한 파열음을 외면하고 보낸 밤이 얼마던가. 요즘 지하철에선 신문을 펼치는 이가 드물다. 문자의 가치가 사멸해가는 이때, 난 강박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글을 찾는다. 서점에 들러 책장에 손을 뻗는다. 늘 읽으면서도 뭔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현대인이 앓는 신경증의 대부분은 자문하지 못해 생긴다. 시대의 소음에 뒤섞여 자성을 잊는다. <스포트라이트>가 내 폐부를 찌른 건 기자 정신 따위가 아니다. 직업윤리가 삐걱거리는 출근길의 뼈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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