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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04. 2018

최소한의 먼지만 피우는 삶

최근 수많은 술자리와 커피 자리(?)가 있었다. 이런 때도 있는 법이다. 늘 먹기만 하던 내 입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일상의 대화에서 세속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있는 그대로 듣고 섣부른 추측으로 대화를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내 미천한 생각에 미뤄 속단하면 이야기는 뻔해진다. 보잘것없는 통념에 비춰 무언가를 생각하는 버릇은 대화의 적이다. 그럴 땐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고개가 삐딱해진다. 짐짓 고개를 주억거리며 언어의 순수한 기능을 받들고자 한다. 단어의 조탁이 미숙해도 괜찮다. 현학적 어휘를 써도 말에 뭍은 먼지를 고이 털어낸다. 어렵지만 이런 생각은 글쓰기에도 도움을 준다. 평소의 즐겨 사용하는 말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문득 새로운 어감을 손에 쥐기도 한다.      


이번 주에 만난 친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차선 변경을 시도한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는 결혼으로 인생 2막을 맞겠다며 입매를 가다듬고 웃는다. 누군가는 직장의 처우가 불만스럽다며 뒷목을 긁고, 난 그들 속에서 못지않은 어려움을 토로한다. 과연 내 뜻이 고이 전달되기는 했을까. 대화라는 것이 말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그 진심이라는 걸 전달하기가 어렵다.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전엔 쉽게 쓴 글이 무조건 좋은 글인 줄 알았다. 잘 읽히는 단문 위주의 쉬운 문장에 끌렸다. 힘 있는 문장은 인생을 가지런하게 정돈하는 힘이 있다. 최근엔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더 많은 생각을 끌어내는 작가들이 좋다. 쉼표와 부사를 늘여 의미를 쌓아가는 문장에 탄복한다. 포크너의 소설이 내게 그런 경우다. <음향과 분노>는 눈을 감고 허공을 헤집는 것처럼 무력하지만, 내 의식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고 믿게끔 한다. 이야기의 얼개가 듬성해지면 읽기는 성기지만, 책장을 덮은 후에 다가오는 것들과 마주하게 된다. 상상의 여진은 내 삶과 대입할 수 있는 여지를 살핀다.


영화 소공녀, 작은 서식지마저 지운 삶


얼마 전 본 영화 <소공녀>에서 주인공 미소는 사우디로 일하러 떠나는 남자 친구에게 묻는다. 왜 가? 남자 친구는 말한다. 남들 다 하는 걸 하려고,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인가 싶지만 우리는 여전히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꿈을 접는다. 현실적이라는 태도로 위장한 체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이면 족한 미소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비록 가사도우미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본다. 이름처럼 그녀는 이 생활에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다. 취향이라는 안전지대는 때론 거창한 삶의 무게를 앞지른다. 떠난 남자 친구는 남들처럼 살길 희망했지만, 미소는 자기를 먹여 살리겠다는 그의 진심에 끝내 동조하지 못했다. 그저 한 번 안아주고 떠나보냈다. 미소는 핸드폰도 없고 집엔 세간이 없어 휑하지만 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며 고개를 살짝 들고 다닌다. 춥지만 맑은 하늘, 못지않게 가난하지만 다정한 남자 친구를 사랑한다. 난방비가 없어 겨울엔 섹스조차 맘대로 못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지만 제법 폼 나는 감색 코트와 긴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도시를 갈지자로 가로지른다. 머리가 하얗게 새는 희귀병에 늘 약을 먹어야 하지만, 그것마저 자기 스타일로 소화하는 길이 덕분에 멋스럽다. 마치 백발마녀전의 임청하처럼 세상에 없는 독립적인 생물체로 보이게끔 하니까. 술집의 편안한 소파에 기대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얼굴은 하루의 노동을 마친 자의 신성한 갈증을 머금고 있다.  


어느 날 정부에서 담뱃값을 올리는 정책을 시행하자 그녀의 위태로운 하루살이도 위협을 받는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집세를 내고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데 무리가 있다. 이럴 땐 더 많은 돈을 벌거나 술을 줄이면 된다. 하지만 미소는 취향을 포기할 수 없는 교양인이다. 미소는 고민 끝에 단칸방에서 짐을 뺀다. 그녀는 비로써 온전한 소공녀(microhabitat)가 된 셈이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도달한 곳은 영화에서 보시면 좋겠다. 당신이 예측할 수 있는 정도의 고난과 관객이 소망하는 수준의 행복 이하를 거머쥐는 결말을 보게 될 테니까. 다만 계속 얘기하고 싶은 건 미소라는 캐릭터다. 집을 포기하고 택한 위스키와 담배의 삶은 분명 쿨하다. 하지만 날고 싶은 비둘기는 끝내 현실에 발붙인 시간을 마주해야 한다.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잠을 자야 하니까. 친구들이 자신을 혐오하는 시선을 봐야 하고, 누군가의 동정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작은 땅덩이에서 취향 하나 고수하며 살기가 이토록 어려운지.      

내 학창 시절, 우리 집의 의미는 각별했다. 전세를 살며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좇는 공무원 가족의 삶이란 다 비슷하다. 중산층이라는 허황된 구호는 삶의 의미를 마치 깔때기로 모은 것처럼 집이라는 공간으로 모은다. 그들의 열망은 고이 자식에게 전이되어 수도권 신도시의 32평 아파트에 머문다. 미소는 그 길에서 이탈한 독립변수다. 영화가 판타지로 보인다면 그 선택의 무모함에 있을 것이다. 내가 느낀 이 영화의 매력은 미소라는 캐릭터가 그 판타지를 구현 가능한 거리에 있게끔 붙잡는다는 점이다.     


요즘 내 주변 지인들이 거액의 빚을 지고 은행에 책잡혀 결혼하는 상황을 지켜본다. 부모세대의 지긋지긋한 열망은 여전히 자식들의 열패감으로 되풀이된다. 취업전쟁과 빈부격차, 신자유주의라는 지긋지긋한 터울은 그들을 몇 포세대로 규정한다. 뭘 포기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일상이란 뭘까. 그건 요즘 말하는 소확행, 워라벨, 욜로와 같은 트렌디한 단어의 의미 속에 있을 것이다.


온전히 혼자될 수 있는 자격


요즘엔 최소한의 먼지만 피우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대단한 야심 따윈 없으니 좋아하는 것만 하다가 조용히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다. 이제 취향의 시대가 도래했다. 황새를 쫓아가기엔 애초에 날지도 못한 암탉임을 자처하고 나선다. 미처 늦기 전에 씨암탉 정도라도 되려고 눈을 돌린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벌이는 딱 퇴근 후에 책상에 앉아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이면 족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최소한의 선택지는 거머쥐려고 한다. 미소가 포기한 월세방은 통념에서 이탈하려는 존엄의 발자국이다. 반면 그녀가 찾아 나선 과거의 친구들은 땅에 발붙이며 힘겹게 발을 내딛고 있었다.

키보드를 멋지게 잘 치던 현정은 시부모와 남편 수발에 지쳐 살고, 밴드의 막내 대용은 이혼의 충격으로 히키코모리를 자처한다. 선배 록이는 결혼에 집착하는 노총각이 되었고, 멋지기로 소문났던 기타리스트 정미는 미소를 깔보며 자신의 안락한 삶을 자위한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이 현실적 인물들은 까치발을 들고 살아가는 미소를 마치 귀신처럼 바라본다. 하얀 머리를 하고 큰 캐리어를 끌며 세상을 배회하는 유령으로 치부한다.     


이 영화의 감독 전고운 감독은 나와 동갑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며 그들의 생각을 들었을 유사 경험의 영역에 놓여있는 친구다. 그녀는 심플하고 단순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끝내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끝내지 못했다. 그건 미소라는 멋진 캐릭터를 만들었지만, 그녀가 이 사회에 무해한 온전히 쿨한 사람임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 방문한다고 달걀 한 판을 사들고 가서 열심히 동거인의 일을 돕는 미소. 오로지 잠만 자면 되기에 돈도 받지 않는 미소. 하지만 어렵사리 침대에 누워도 불편한 마음은 왜일까. 그건 한 인간이 그 인간이라는 말처럼 사람 사이에서 부대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미소는 필연적인 갈등을 겁내지 않지만 애초에 그녀가 세웠던 하루의 소소한 행복이란 그 부대낌을 배제한 것이었기에 발걸음이 무겁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력과 혼자 있는 시간을 강조하는 시대에서 <소공녀>는 온전히 홀로 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시대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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