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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1. 2019

슬픔의 위안

오늘은 집에 들어와서 <디 아워스>를 봤다.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처럼 적막이 가득하다. 감정이 터져 나오는 지점을 최대한 자제한 덕분이다. 영화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웅크린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골똘한 사람에게 호의를 갖는다. 정적을 불편해하는 이라면 질색하겠지만, 내 경우엔 서로 멀뚱멀뚱 쳐다봐도 수줍은 사람이 좋다. 중요한 건 같이 이 자리에 있겠다는 호의다. 마침내 입을 연 그는 조용히 읊조린다. 말을 고르고 다져서인지 군더더기가 없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솎아낸다. 저지방 우유처럼 고소함은 덜해도 소화는 잘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인, 1923년 버지니아 울프 1951년 로라 그리고 오늘날 뉴욕에 사는 클래리사. 각기 다른 시공간의 세 여성은 한없이 맑은 오후에 각기 다른 고민을 한다. 모든 게 풍족해 보이는 그들은 침대에 모로 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흩어진 시간이 무색하게 공명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난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갑작스럽게 가정에 위기가 닥쳐와 가족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쭉 가난해 온 것과 갑자기 가난해진 것은 다르다. 충격의 여파는 오래가고,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가난해지면 집이 좁아지고, 가구를 버리게 된다. 손때 뭍은 물건이 버려지면 마음이 황폐해진다. 늘 목이 마른 기분에 책만 본다. 가난의 형태는 내가 알기론 다들 비슷하다. 모두의 예측처럼 전형적으로 가난해진다. 어디서 말하기도 민망하다. 다들 그 정도의 가난은 가지고 있으니까. 가난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덤덤해졌던 것 같다.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 가난은 짐짓 희미해졌다. 어릴 땐 가난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이 터놓진 않지만, 내 젊음을 무기 삼아 콧방귀 뀌었다. 가끔 사고 싶은 걸 못 사고, 불편한 게 좀 있을 뿐 가난은 옆에 놓인 저변이었다. 내가 짊어진 봇짐엔 뜨신 도시락이 있었고, 가끔 친구들과 그것을 꺼내먹으며 힘을 냈다. 가난은 그저 훨훨 비상할 내 미래를 돋보이게 할 장식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서른이 넘은 지금 가난은 없어졌을까. 아니다 실제 가난했던 그때보다 더 가난이 명확하게 만져진다. 왜냐면 가난이 미덕이 아닌 삶을 살기 때문이다. 난 <디 아워스>를 보고 가난을 떠올렸다. 이어폰을 꼽고 한없이 긴 등굣길을 걷던 시간을 응시했다. 가난했던 시절에 날 떠났던 사람과 그것을 말로 하지 못해서 앓던 공간이 아른거렸다. 좋은 영화는 때론 내가 지워버린 시간을 다시 상기시킨다. 슬픔을 상기하는 시간이지만 똑바로 바라볼 수 있기에 뜻 모를 위안을 삼킨다.


영화를 다 봐도 세 여인의 곪은 부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녀의 하루를 슬쩍 엿볼 뿐이니까. 확실한 건 결코 형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말을 줄이면 감정은 더 절실하다. 세 여인은 마음을 깨부수고 다시 일으킨다. 모든 곡절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땅이 깨지고 지층이 뒤흔들려도 그녀들은 아랑곳 않는다. 세 여인의 음울한 일상엔 미사여구가 없다. 그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체 읊조린다. 야멸찬 우울에 도망칠 구석이 없다. 타인이 아무리 위로하려 해 봤자 무용하다. 어떤 조언도 그저 말뿐이다. 몸을 웅크린 사람은 다 그렇다.


속앓이 하는 이에게 문학은 어쩌면 도피처가 될지도 모른다. 내 울적한 학창 시절은 무수한 범죄소설로 점철되어 있다. 부모님이 싸워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사건 해결에 힘썼다. 마치 지옥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긴다. <디 아워스>에선 죽음이 도피처다. 죽음이 해소일 수 있다고 속삭인다. 누군가는 끝내 부정하겠지만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버지니아가 돌덩이를 앉고 서서히 물에 잠기고, 클래리사의 연인 리처드가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엔 단정한 마침표가 찍혀있다.

“나는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아. 죽음은 커다란 위안이 될 수도 있어. 거기에는 무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을 수도 있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는 버지니아 앞에 선 남편의 얼굴이다. 버지니아의 병세를 걱정해 런던을 떠나 교외까지 이사를 왔는데, 그녀는 아랑곳없이 몰래 그를 떠나려 한다. 고통받는 남편을 향해 한치의 배려도 없이 죽는 게 낫다고 읊조리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한번 더 무너지는 남편.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의 청을 수락한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타자라는 무력감. 그의 성긴 미소엔 앙상한 바닥이 드러난다. 가닿을 수 없고 도달하지 못해 낭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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