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우린 마포구 일대와 여의도를 걸으며 벚꽃 놀이를 했습니다. 그날 당신으로 만나려고 새로 산 셔츠를 입고 백탁 크림을 바르고 나섰던 기억이 납니다. 우린 들뜬 마음으로 인파에 섞여 맛집을 찾고,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잔에 내주는 커피도 마셨어요. 그날 거리의 사람들 표정엔 환희가 가득했어요. 꽃이 흩날리고 실바람이 부니 좋지 않을 수가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런 행복은 드문 일이잖아요. 그날 전 잘 찍지도 않는 사진도 남겼어요. 그 참에 카카오톡 프로필도 바꿨고, 잘 조율된 삶을 사는 기분에 배경 음악도 달곰한 곡으로 걸었습니다.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는 제대로 된 봄의 제전이었어요. 남들 못지않은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만능감이 피어올랐습니다. 모두 당신 덕분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152번 버스 안에는 저와 비슷한 얼굴을 한 뭇 젊은이들이 고개를 파묻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대고 있었어요. #벚꽃스타그램 태그를 붙였겠죠. 벚꽃놀이를 마친 서울을 비추는 서쪽 유리창에 황적색 저녁놀이 와닿았습니다.
마포대교를 넘는 버스 안에서 차창에 기대 눈을 감으니 다시 속내가 복잡해졌습니다. 며칠 전부터 이어지던 고민이 계속됐어요. 절 갉아먹고 옭아매며 놔주지도 않는 골칫덩이가 정수리 한가운데 진득했어요. 어디에 말도 못 한 속앓이였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구겨진 옷에 섬유 탈취제를 뿌리고 옷장에 거는데 어깨 부근에 당신의 향수 냄새가 났어요. 전 당신에게 들어갔다는 메시지도 없이 뭐에 홀린 것처럼 밀린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허물처럼 벗어놓은 빨랫감도 다 주워 세탁기에 넣어 돌렸습니다. 욕실에서 땀에 젖은 몸과 텁텁한 입을 씻어내고 침대에 드러누웠습니다. 기분이 멀끔해졌지만 잠은 오질 않았어요. 눈을 감을라치면 스멀스멀 불길한 형상이 떠올랐습니다. 전 분명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별수 없이 노트북을 켜고 고민하는 바를 적었어요. 속에 얹혔던 낙지를 토해내듯 웩. 컴컴한 어둠 위에 토해진 낙지의 꿈틀거림과 잘 그려지지 않는 당신의 뒷모습과 어찌 보면 체념에 가까운, 그러나 다시 현실감각을 곤두세우는 공기의 딱딱한 울림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봄이 오지 않았다면 생각지도 않았을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겨울이 계속되었다면 이미 결단했을 이별이었어요. 거룩한 계절, 만물의 기적, 기적과 같은 하늘을 보니 도무지 헤어짐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당신과 헤어지는 걸 생각하면 살을 에는 고통이 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속이 텅 빈 상태로 지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미안함만으로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새벽 기분에 취해 글을 다 쓰고 보니 싱크대에 찌든 얼룩같이 우중충한 글이 나왔습니다.
행복에 겨운 날에도 비극을 떠올리는 게 제 특기예요. 삶이 뭔가 풍요롭고, 만족할라치면 쉽게 지겨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꽤 복잡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레이먼드 카버나 이승우, 윌리엄 포크너, 필립 로스처럼 속이 뒤틀린 작가들 책을 침대 곁에 쌓아두고 읽습니다. 그들 작품을 읽고 있으면 저만 비정상은 아니라는 증거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읽는 것처럼 온전한 정신과 균형 감각을 지닌 인물이 그릇된 선택으로 나락에 빠지는 이야기를 보며 전율하곤 합니다. 소설 속 인물의 삶에 저를 대입하고 비견하여 누가 더 나은 선택을 했는지 따져봅니다.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말하는 일종의 쌤통 심리를 느끼기도 합니다. 비극의 서사를 읽고 안도하는 꼴이라니. 저는 소설 속의 인간말종보다는 나쁘지 않다고 자위하는 짓이라니. 그래서인지 소설이 조금만 밝고 낙천적이면 시시하게 느끼곤 합니다. 어이구 행복하셔라.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복하면 단가 싶고, 속이 비비 꼬여서는 해피엔딩을 맞은 인물을 저주합니다. 어디서 말 못 하는 못난 생각이지만 저 나름대로 자위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뒤틀린 성미를 지니고 있으니 제가 쓰는 글도 조금만 긍정적으로 쓸라치면 다 가짜 같아서 지워버립니다. 한낱 기분에 제가 믿지도 않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적고 후회합니다. 벚꽃 놀이하고 들어와서 참혹한 기분을 적는 게 말이나 되나 싶겠지만 세상의 환희를 보고 어둠을 적는 게 저라는 사람입니다. 제 속내엔 모든 게 안정적인 건 우연일 뿐, 삶의 본색은 고되고 힘들다는 믿음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독서 모임을 해도 밝은 기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에겐 인색한 인상을 받습니다. 저 속엔 뭔가 구린 게 있을 거라고 근거 없이 넘겨짚으며 오해합니다. 이런 태도가 얼마나 이상한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희망에 차서 의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그런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게 왜 그렇게 싫을까요. 요즘 말로 관종일까요.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왜 부정할까요. 고뇌하는 젊음은 멋이라도 있지, 이 나이에 이렇게 비관적이면 건강검진은 언제 받았냐는 소리나 듣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별 내용이 없기 때문에 아무 소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글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포괄하는 셈이죠. 그건 저조차도 제가 뭘 쓰는지 잘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줄곧 제 재능을 의심해왔고, 아무리 노력해봤자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할지 모른다고 비관하며 씁니다. 그래도 지칠 잠이 안 올 때는 고삐가 풀린 채로 쓰며 기분전환을 합니다. 제가 남들과 달리 왜곡된 상태라는 걸 글로 알리길 좋아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반골 기질을 드러내며 사회의 불순분자임을 자처하는 걸 드러내 놓고 싶습니다. 겉으로 보면 반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시커멓다는 걸 적나라하게 적으면 속이 시원합니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다 적으면 문제가 될 터이니, 정보를 흐릿하게 변형해서 이게 지금 현실인지 허구인지 나조차도 헷갈리게 쓰고서는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읽은 건지, 뉴스에서 들은 건지, 어디 술자리에서 들은 건지 출처도 모르는 걸 내 맘대로 해석해서 쓰고 있습니다. 매일 엇비슷한 일과를 보내는 제가 유별날 방법은 도드라진 문장뿐이거든요. 사무실에서 회의할 때는 말 없이 수첩에 복슬복슬한 양들을 그려 넣습니다. 벚꽃을 보고 온 밤에는 가차 없이 그 양들을 죽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라 우리의 이별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고 당신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최근에 전 당신과 겪은 연애담을 글로 여러 편 썼습니다. 우리가 이별하는 과정을 오그라들지만 지독한 과잉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여과 없이 적기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연애에 관한 단상이 떠오를라치면 포스트잇에 적었다가 매일 밤 글로 풀어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작 널 만나서 행복했고 너와의 시간은 제 삶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단순한 메시지를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서 적은 셈입니다. 연애가 마치 불행의 총체인 것처럼 엄살을 떨었다가, 외로움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굴며 오락가락 반복했어도 결국 그런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다 써보고 든 생각은 우린 서로의 눈을 보면서 사랑이라고 힘주어 말했지만 사실 그건 집착, 광기, 자기 파괴라고 이름 붙여도 하등 상관없는 감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무수한 대화를 했지만, 정작 사랑의 주변부를 맴돌고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제게 사랑의 중심은 가짜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제가 읽어온 일류 작가들은 무력한 펜대를 움켜쥐고 사랑 대신 사랑이라는 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전 사랑이 말해질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랑을 말함으로써 제가 겪은 사랑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있는 힘껏 쓰려고 합니다.
어쩌면 쉽게 다다르지 못한다는 기분이야말로 예술의 특권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신이 사랑은 초콜릿 상자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으니, 전 맘 편히 사랑에 관한 온갖 잡소리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당신 마음을 헤아려보고, 당신이 제게 뭘 남겼는지도 상세하게 기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문학을 좋아하는지도 대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인간 조건을 규정하는 도덕적인 딜레마를 포함해서 보편적 주제의 창작물까지 왜 저는 그렇게 읽고 보고 써댔을까. 처음엔 제가 무지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제 삶은 늘 우환덩어리고 커다란 불만이며 원하는 걸 갖지 못했다는 불안 때문에 작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삶은 즉흥적인 생방송과 같아서 늘 부박하고 불완전하기 마련입니다. 글은 그런 일상에 서프라이즈의 재연 드라마처럼 과거를 불러들일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과를 불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귀착된다는 점에서 재귀적인 성찰을 안겨줬습니다. 후회로 얼룩진 대지에서 까치발을 들고 도약을 꿈꿀 수 있게 인도했습니다. 당신은 현실감각을 잃고 널뛰기를 하는 제 글을 다 읽어주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다 보듬어주며 좋은 글이라고 해줬습니다. 그런 고마움을 떠올려서 글로 적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작년에 당신과 함께한 벚꽃 놀이는 제게 여러 질문을 남겼지만, 이렇게 끝내 답을 적으면서 당신을 글 속에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작년 이맘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올해는 어떤 벚꽃을 보고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모든 게 까마득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