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레놀 하나면 될 일

by 박민진

며칠 전 사무실에서 퇴근하려는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정말 독서뿐인가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책과 영화밖에 몰라서 이러고 사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생전 없던 고민인데 저도 이제 늙어가나 봐요. 커피를 들고 극장에서 신작 영화를 고르는 건 절 온전하게 합니다. 퇴근과 함께 들른 서점에서 소설책을 사서 나오면 벅찬 기분에 휩싸이곤 하죠. 카페에서 들뜬 마음으로 신간 소설을 넘기면 황혼 녘에 한 소년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어요. 아파트 놀이터는 비좁지만, 동네 아이들이 죄다 모이는 아지트라서 바글바글하죠. 소년은 얼마 못 가 엄마 손에 붙들려 집으로 향합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엄마의 호통에 찍소리도 못하고 끌려갑니다. 그걸 지켜보는 동네 애들은 비웃고, 소년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하지만 다부진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을 붙든 채 저 멀리 사라져 버립니다. 노을 속으로 명멸하는 두 사람의 이미지는 텍스트를 넘어 제 일상에까지 침범해 와요. 어쩌면 전 독서를 통해 놀이터의 소년처럼 어디론가 휩쓸려 가는지도 모릅니다. 쉽사리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이야기라는 환영을 통해 30밀리의 마취제를 투여하는 삶이죠. 비슷하게는 영화의 스펙터클을 망막에 덧씌우고 현실을 잊는 밤도 있습니다. 전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하던 일을 멈추고 제 행복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믿는 순진한 꿈이 점점 더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창밖으로 테니스 채를 흔들며 걸어가는 후배들이 눈에 들어왔죠. 더 놀고 싶음에도 붙들려 가는 아이와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전 뭔가 나아져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건 저도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안정적인 직장을 찾았습니다. 흥미와 취향을 꼼꼼하게 따져 진학한 당신과는 달리 전 약삭빠르게 직장에 안착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할 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더라고요. 직장을 오래 다니니 매너리즘에 빠졌고, 외국어를 잘하고 싶어 학원을 전전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자마자 그럴싸한 승용차를 덜컥 사버렸고, 주위 사람들이 지겨워져서 온갖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 학교 선배는 십 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고삐를 늦추 수 없을 거라고 조언했습니다. 옆 사무실 후배는 남자로서 마땅한 일을 하겠다며 청첩장을 내밀었습니다. 전 초조함에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하니 글도 잘 안 써지더군요. 전 이게 슬럼프인가 추측만 할 뿐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제가 삶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권태입니다. 매일 비슷하게 살면서 얼마나 다른 글을 쓰려고 버둥대는지 모릅니다. 일상에서 찾아오는 허무한 기분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재밌어야만 하거든요. 사실 권태와 허무를 막을 뾰족한 수는 여태 찾지 못했습니다. 매일 비슷한 패턴으로 살지만, 이것이 온전히 날 위한 길인지 알 방도도 없고. 그래서 늘 고립된 채 살 궁리를 도모하면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노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생각하자 생각만이 날 구해낼 수 있어.’ 절 바꿔줄 수 있는 자유로는 어디 있을까. 인생의 비밀은 도통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언제쯤 뭔가를 깨닫긴 하겠지만 그래 봤자 늦어버린 후일 거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긴 몇 개의 조각과 찢긴 귀퉁이를 주워 모으는 게 삶이니까요. 전 긴 슬럼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독서는 내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탈 없이 살고 있다는 환상을 주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그게 비단 환각에 불과할지라도 기꺼이 그 수용액을 내 몸에 투여할 수밖에 없다고.


당신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영원한 사랑 안에 안식하고 싶다고 했었죠. 전 그 생각을 존중했지만, 그 생각에 저는 빠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말한 계획처럼 집에서 도록이라도 펼쳐보고 있나요. 다 잘 풀리고 있다며 미소 짓고 있나요. 우리가 함께 누워서 책을 읽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아무 책이나 골라잡고 제가 열심히 낭독하면 당신은 참 좋아했죠. 그런 시간은 잊히지 않을 거고, 전 뭔가 무료하고 심심할 때면 그런 기억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버텨낼 것 같습니다. 오늘도 많이 늦었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