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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9. 2019

우연처럼 보여도 우연이 아닌

바이스, Vice, 2018

전기물을 좋아한다. 드라마틱한 인생 곡절에 끌려서가 아니다. 내 흥미는 작가의 취사선택에 있다. 한 인간의 삶에서 솎아낸 몇몇 사건들이 인생을 포괄한다. 일종의 프랙털(fractal)처럼 생은 순간들의 자기 유사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좋은 전기는 종종 아무런 개연이 없어 보이는 사건을 통해 삶을 관통한다. 별생각 없이 흘려보낸 오늘 하루, 쓸모없는 비애감에 젖어 길을 걷는 시간에 생의 비밀이 있다.

영화 <바이스>는 화려한 스타 캐스팅이 빛나는 영화다. 늘 외형적 변화를 통해 연기력을 끌어내는 메서드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묘기가 유효하고, 총명한 배우 '에이미 아담스'는 여전히 강철 같은 대사를 읊는다. '스티브 카렐'은 바보스런 럼즈펠드 역을 맡아 능청스럽게 몰락한다. 하지만 정작 깔깔거리며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내가 떠올린 건 '칫솔'이었다.


거울을 보는 ‘딕 체니’(크리스천 베일)는 뚱한 얼굴로 이를 닦는다. 당시 국방부 장관을 지냈으나 오랫동안 재야에 있던 체니는 ‘조지 부시’(샘 록웰)의 러닝메이트 제안을 받는다. 이미 오랜 시간 공직에 있었고, 레즈비언 딸이 상처 받을 것을 고려해 대선마저 마다한 체니에겐 마뜩잖은 제의다. 편안하게 기업 사외이사나 하며 골프나 치는 중인데 굳이 당선도 불분명한 텍사스 촌놈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라니. 하지만 며칠 후 조지 부시를 만나고 돌아온 체니의 표정은 심상치 않다. 그건 이성적인 판단을 누르는 본능의 장난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성적 사고는 충실한 종(從)이지만, 본능적인 마음은 신성한 천부(天賦)라고 했다. 우리는 종을 숭배하는 사회를 만드느라 우리의 천부를 버리고 있다. 조지와 만나고 돌아온 날 체니는 이를 닦으며 중대 기로에 서 있음을 직감한다. 혀의 잔여물을 꼼꼼히 쓸어내고 가글을 하면서 이런 생각은 더 확고해진다. 영화는 무심하게 거울 앞에 선 체니의 골똘한 표정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기류가 묘하게 뒤틀렸던 지점이 바로 체니의 욕실임을 상기한다.

며칠 후 조지 부시가 텍사스의 자택으로 체니를 초청하고, 체니는 대통령 권한의 대부분을 자기가 행사하는 조건으로 부통령직을 수용한다. 부시는 멋모르고 치킨을 뜯으며 이에 동의한다. 보통 역사적인 사건은 누가 봐도 의미심장한 결정과 함께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세계대전의 시작도, 히틀러의 집권도 더 나아가 각 대륙의 숱한 내전도 모두 보잘것없는 우연이 겹쳐진 결과다. 비극은 너무 흔해서 쉽게 잊고 마는, 미처 깨닫지 못한 그런 순간에 있다. 영화는 딕 체니가 조지 부시의 못마땅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시간 사이에 뜻 모를 '칫솔신'을 넣어 생의 복잡성을 시위한다.


영화는 이후 딕 체니의 몰락을 다룬다. 9. 11 테러와 두 번의 전쟁, 지속되는 오판과 무모한 결정이 부른 참극. 영화는 이를 조롱하듯 묘사하지만 난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연에 의지해 살아갈까. 며칠 전 한 신문에서 인간의 직감이 생각보다 무척 정확하다는 연구 결과를 봤다. 보잘것없는 짐작과 논리적 추론보다 오히려 더 진실에 가닿아 있을 수 있다는 말. 머리가 흰 연구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한다. 우연처럼 보여도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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