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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8. 2019

무수한 개츠비의 세계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어떤 소설가는 평생 한 이야기만 쓴다. 커튼 뒤 날씨가 미세하게 다르듯 정조만 오르내린다. 하루키는 무수한 소설을 썼지만 내 눈엔 앙상한 자취만 남긴다. 늘 혼자되길 주저하지 않는 남자, 고요한 방에 놓인 책상과 종이의 공간. 그건 비록 누추한 방이지만 하나의 세계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은 책상과 몇 안 되는 옷가지, 세간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부스러기들. 주위를 둘러보면 표지만 봐도 지루한 소설이 거슬린다. 토마스 만, 포크너 뭐 그런 것들. 그는 암암리에 생겨난 오염물을 멀리하며, 세상 돌아가는 일엔 영 무심하다. 오직 그 속에 기거한 체 모호한 문장을 적는다.


무수한 개츠비들의 자기 복제


이 남자에게 어김없이 여자 친구가 생긴다. 누가 보기에도 그에겐 과분한 그녀.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어딘지 미심쩍다. 뭐가 문제인 걸까. 그에겐 오래된 연인이 있다. 그녀를 떠올리며 마스터베이션을 한다.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잊을 수 없다는 정서가 핵심이다. 산책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셔도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 미래가 없는 관계에 집착하지 말라고 누군가 충고해도 어쩔 수 없다. 부스러진 회한만이 희끄무레하다. 갈팡질팡하던 녀석은 무수한 밤을 헤맨 후에야 여자 친구를 찾는다. 아마도 녀석은 작가가 될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누군가는 이를 두고 성장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난 기차역에 사람이 몰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 한다.

서점에 수북하게 쌓인 하루키의 소설은 이러한 패턴 안에 있다. 난 언제나 그만 읽어야지 다짐하면서도 하루키를 들고 나선다. 최근 며칠간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며 화자인 ‘와타나베’에 기시감을 느꼈다. 서울의 무수한 카페엔 개츠비들이 가득하다. 매일 빙빙 도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조용히 뭔가를 끄적이는 그들. 의심스러운 말이 횡횡하는 세상에서 얼치기들을 멀리하는 그들. 내 하루는 하루키의 자장에 놓여있다.


<노르웨이의 숲> 배경이 되는 60년대 후반은 일본에서 ‘전학 공투 회의’가 한창일 때다. 대학 독립성을 위해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젊은이가 대학가를 잠식했다. 그들은 확신에 처서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과 멀찍이 선 ‘와타나베’는 눈에 불을 켠 무리를 미심쩍어한다. 사색보다는 일갈하길 좋아하는 행동주의자가 만든 세상은 얼마나 포악한가. 와타나베는 교정을 홀로 거닐며 스스로 고립한다. 시대는 주류 가치에 동떨어진 자를 패배자로 여긴다. 세계는 이념을 따라 변화하며 다수는 그 호랑이에 올라탔을 뿐이다. 체념을 머금은 와타나베는 기억에만 잔재한 그녀를 찾아 떠난다.


한국은 집단성이 강한 나라다. 심지어 자기 아내에게 ‘우리’라는 말을 갖다 붙이고 뿌듯해한다. 뭔가를 같이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홀로 이탈하면 갈피를 못 잡는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정도가 더 심해진다. 혼자 밥 먹으면 왕따, 혼자 책 읽으면 고립으로 치부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자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를 문제시한다. 하지만 세상도 변해가며 개인주의 시대를 소환했다. 마치 큰 물결처럼 도심을 잠식하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념 투쟁을 하던 시절은 가물거리고, 로큰롤이 주류 가치를 깨부수던 시대도 이제 끝났다. 미디어는 버릇처럼 어디에나 ‘혼’ 자를 붙이며 고독을 강조한다. 콤플렉스에 민감한 15살 소년처럼 병적인 구석이 없지 않다. 시대의 소음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와타나베 같은 친구는 부담이 적다. 내 작은 원룸 방 한편을 내줘도 그는 얌전히 마일스 데이비스 재즈나 듣겠지. 와타나베는 여러 가지 고독이 둘러싼 도시의 외톨이다. 책장에 꽂힌 하루키 소설은 혼자인 당신을 근사한 기분에 젖게 한다. 아니 오히려 혼자가 되었기에 비로써 포착 가능한 정서를 훑는다. 우리는 때론 위로받기 위해 현실과 동떨어진 소설을 읽는다.

소설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문장은,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이다. <상실의 시대>의 여러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칠판에 무언가를 적은 학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듯 망설임이 없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으면 섹스는 곁가지처럼 솟아난다. 의미를 배제한 체 섹스에 탐닉하며 시간을 죽인다. 거기엔 어차피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식의 죽음을 향한 탐미적 태도가 있다. 와타나베에게 섹스란 미래 지향적인 관계도 아니고, 훗날을 그리는 약속도 아니다. 그건 그 자체로 현실에서 개운한 일일 뿐이다.


무엇이 '버닝'을 의식하게 하는가


최근 영화비평 잡지 FILO를 읽다가 <버닝>에 관한 글을 읽었다. 정한석 평론가가 생선에 살을 발라내듯 텍스트를 해부한다. 물론 한 호흡에 읽긴 어려웠다. 그간 영화 평론을 되도록 피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대다수 평론가의 비평은 문장 하나하나에 의미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어느 순간 한 문장이라도 놓치면 발목이 웅덩이에 빠져버린다. 정한석의 글은 지극히 반 하루키적이다. <버닝> 원작 <헛간을 태우다>를 쓴 하루키가 플롯에 성긴 그물을 쳐 고의적인 의미 배제에 힘쓴다면, 정한석의 비평은 촘촘한 그물 안에서 의미를 낚는다. 정한석의 글은 대체로 <버닝>을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손쉽게 내리깔지 않는다. 조목조목 장면의 분위기와 파장을 짚어내며 이야기의 결을 넓힌다. 난 이 글을 읽으며 지난 며칠간 내 머릿속에 버닝이 부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버닝엔 뭐가 있기에 날 사로잡는 걸까.

영화 속 종수는(유이인 분)은 혼돈에 빠져 있지만, 시선은 결코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 종수가 그리는 여인, 실종된 여인, 그를 메타포로 빠뜨리는 도심 속 개츠비까지. 종수는 삼각관계 안에 침잠한다. 여기엔 병적이 구석이 없지 않아 집착과 탐닉으로 이어진다. 내게 <버닝>은 원작이 아닌, 저자 하루키의 세계관을 복제한 작품이다. 종수의 방과 포크너 단편집이 가져온 편린엔 하루키의 자취가 있다. 난 텍스트의 맥락 속에서 하루키가 내재한 개츠비들의 흔적을 찾아내곤 빠져들었다. 그리고 혼자가 된 종수가 마침내 글을 적기 시작할 때 뜻 모를 안도를 품고 극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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