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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3. 2019

나는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저, 2016

 한 인간은 7년의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한다. 물론 물리적 실체에 국한된 얘기다.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새로운 신상으로 교체된다. 나를 구성하는 소립자들이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면 내가 나일 수 있을까. <더 브레인>의 저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데이비드 이글먼’에 따르면 오로지 ‘기억’만이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라 한다. 뇌 속 뉴런에 새겨진 경험의 입자들이 내 기억에 영사되면 난 고유성을 획득한다.


토니 스캇이 남긴 자취


 '12년 8월 20일 LA 산페드로의 빈센트 토마스 다리에서 한 남자가 투신했다. 경쾌한 액션 영화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감독 ‘토니 스캇’이다. 투신 당일 아침, 해외 뉴스 단신에는 그의 죽음에 관한 짧은 보도가 실렸다. 아침 출근길에 폰을 쉭쉭 넘기던 난 잠시 애도의 마음을 가졌을 뿐 금세 잊어버렸다. 시간은 그의 형 ‘리들리 스콧’에게 예술적 성취를 안겼지만 정작 본인은 상업영화감독 그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난 토니 스캇을 플롯이 탄탄한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흔치 않은 스타일리스트로 기억한다. 그의 연출작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트루 로맨스>, <더 팬> 같은 작품들은 내가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마음을 내어준 영화들이다.

영화감독 토니 스콧(1944 ~ 2012)

 그 날 저녁, 잠들기 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다리 위에 서 있는 토니 스캇을 떠올렸다. 뒤척이다 일어나 구글맵으로 LA의 낡은 다리를 찾아봤다. 다리 아래 강물은 밤처럼 검고 암담하다. 다리를 지지하는 시멘트 덩어리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지나치게 황량하다. 그는 왜 여기에 떨어져야 했을까. 가닿지 못할 그의 마음을 상상하며 뒤척였다.

 검색 창에 토니 스캇을 넣어보면 몇몇 글들을 읽을 수 있다. 누군가의 정성 어린 헌사들을 보며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무수한 이들이 있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마음이 상하는 부분도 있더라. 그의 투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치 실패로 간주하는 말들.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건넨 말들이 오히려 한 남자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이 예순여덟의 남자가 남긴 삶의 마지막 자취만 보고 쉽게 재단하는 말들이 싫었다. 토니 스캇의 영화들은 내 기억 속에 고유한 형태로 새겨져 있다. 그의 영화를 즐겼을 무수한 관객들의 기억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난 그들의 기억이 실패자가 남긴 부산물처럼 부정당하길 원치 않는다. 평소 누군가의 행태를 보고 통념에 빗대 판단하는 언사에 주의한다. 내가 평소 신뢰하는 말하기는 역설을 염두한 이탈자의 숙고다. 게으른 관념을 경계하길 주저 않는 작가들에 경애의 마음을 갖는다. 죽음이 불가역적인 현실이라면, 한 사람이 남긴 기억은 침대맡 드리워진 달빛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보통의 존재가 가지는 폭력성


 소설 <편의점 인간>은 사회적 고리에서 한 끗 벗어난 인간상을 통해 통념에 제동을 건다. 소설은 이른바 ‘프리터’라 불리는 편의점 알바의 생을 다룬다. 이 용어는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는 직업 방식을 뜻한다. 한국의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일본처럼 프리터가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뉴스에서 종종 보았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이 자발적 프리터의 비율이 높은 반면, 한국은 일종의 자포자기 상태의 비자발적 프리터가 더 많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런 서글픈 고민들은 시대의 화두가 되어 요즘 소설 곳곳에서 눈에 띈다. 특히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하나의 문학적 형식이 될 정도로 시대의 자화상이 된 지 오래다. 한국 문학에 담긴 편의점의 맥락은 고달픔과 빈곤, 막막함을 표상한다. 특히 편의점 음식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아끼기 위해 끼니를 때운다는 인식이 강하다. ‘삼각김밥’, ‘컵라면’ 같은 편의점의 세포들은 터덜터덜 움직이는 굽은 등에 새겨져 있다.

영화 <황해> 속 편의점, 하정우 먹방

 <편의점 사회학>을 쓴 전상인은 말한다. “지금 당장 주위를 돌아봐라. 편의점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면서 비닐봉지 한 개 분 정도의 내일을 준비하는 동료나 친구, 이웃이나 친척이 얼마나 많은지" <편의점 인간> 속 화자의 분위기는 이와 사뭇 다르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학교나 사회에서 겉돌며 커 온 '게이코'는 결국 18년 동안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며 독신으로 산다. 모든 일이 매뉴얼화돼 있는 편의점이 게이코의 세포를 점유하는 셈이다. 그녀에겐 편의점이 가진 시스템이 마음을 안착할 수 있는 안식처다. 문제는 그녀가 ‘자기다움’으로 내세우는 편의점 인생을 타인들은 덜떨어진 무언가로 쉽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타자들이 정의하는 정상의 삶을 척도로 삼으면 사고는 단순해진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서 결혼하고 애 낳고 승진하고 내 집을 사서 연금에 가입하여 노후를 대비하는 삶이라는 틀에 몸을 구부려야 한다. 그들이 강요하는 보통은 그렇기에 폭력적이고 단선적이다. 개별성을 부정하는 시선은 섣부른 말의 폭력으로 변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게이코를 침범한다. 그녀는 자기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 구실을 하며 일상을 꾸린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아무도 그녀를 정상 범주에 넣어주지 않음에 초조함을 느낀다. 결국 말만 뻔지르르한 놈팡이를 집에 들여 본격적으로 보통을 흉내 내는 삶을 살지만 스스로 소멸됨을 느낄 뿐이다.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저

 소설은 특이한 사회 부적응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질문의 화살은 공통의 물음에 안착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 제대로 선택하며 사는 걸까. 요즘 서점에는 인문서를 사칭한 자기 계발서들이 잘 팔린다. 난 종종 이런 책들이 하는 소리에 겁이 날 때가 있다. 단언을 기꺼워하는 치들은 말로 현실의 복잡함을 정연하게 만든다. 억지 춘향식으로 쉬운 답을 내놓는다. 생존의 기술을 취득하는 동시에 교양인으로서 취향껏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는 게 불가해진 난 그런 말들에 밑줄을 친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말처럼 다림질하듯 곧게 펴지는가. <편의점 인생>은 정확하게 그 지점을 파고들어 너스레를 떤다. 일상의 모든 일에 의구심을 갖는 게이코의 생각은 어리숙해 보인다. 그녀는 소위 일반인들의 관성적인 상식에 의구심을 표한다. 평소 당연하다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게으른 사고에서 나오는지 짚어낸다. 일과에 맞춰 먹이를 섭취하며 출근이나 기다리는 게이코는 언뜻 보면 우습지만, 직장과 생계에 저당 잡힌 그녀의 일상은 결코 나와 멀지 않다. 늘 같은 생각을 하고 살며 같은 방식의 선택을 하는 건 사실상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편적 삶의 방식은 의구심을 지운다. 지치고 피곤해서 머리가 아우성처도 현실에 수긍하고 만다. 소설이 살피는 게이코의 비사회성은 그런 의미에서 통렬하다. 상식과 직관으로 연명하는 보통의 존재란 편의점의 물건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흔한 편의점 도시락과 라면

나는 편의점에 간다


 요즘 편의점 도시락을 종종 먹는다. 예전처럼 비참한 기분이 드는 저질 음식이 아니다. 간단하고 저렴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소설을 읽고 편의점을 들어가 보니 새삼 다르게 보였다. 매뉴얼로 정리된 서비스와 진열된 상품들은 저마다의 규칙을 가진다. 편의점 밖이 카오스의 영역에서 버둥거리는 꼴이라면, 이 작은 공간의 안온함은 코스모스의 정연함에 기인한다. 게이코는 이 작은 시스템에 안착한 후 사랑을 느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지금도 꿈틀거리는 그 투명한 유리 상자를 생각한다. 가게는 청결한 수조 안에서 지금도 기계 장치처럼 움직인다. 그 광경을 상상하고 있으면 가게 안의 소리들이 고막 안쪽에 되살아나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 그것만이 나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는 시스템에 완전히 동화된 자의 고백이다. '빅토르 위고'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다시 확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난 이 말을 빗대 게이코에게 전한다. 자신의 공간을 축소시킨 후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는 마음 역시 사랑의 한 형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깥이라는 분리성이다. 바깥을 늘 의식하며 거기에도 누군가 작은 세상을 구축한 후 살아간다는 인식이 있어야 내 개인의 공간을 분리해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 놓고 정착할 공간 하나에 허덕이며 사회와 이어진 실오라기 하나 간신히 부여잡고 발버둥 친다. 그럴수록 자기 세계에 매몰되어 바깥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게이코는 자신과 정 반대의 사회 부적응자 '시라하'와 살아보며 내 존재 바깥의 타자를 인식했다. 고립되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듣고 “평생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존중했다. 그 차이를 인정한 체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갔기에 난 이 짧은 소설을 일종의 성장소설로 읽었다. 그녀는 갇힌 바 없이 오롯이 홀로 걸어갔다.

 18년의 시간 게이코의 세포 속엔 편의점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그녀에겐 편의점 이외의 세상은 혼돈 그 자체일 뿐이다. 난 종종 내가 과거에 읽은 책들이 기억이 안 날 때 불안함을 느낀다. 내가 몰두한 그 시간들이 휘발된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그럴 때마다 난 그 시간들이 세포 단위로 쪼개져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굳게 믿어버린다. 그러지 않고는 쉽게 잠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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