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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30. 2019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사랑의 생애, 이승우 저

세 번의 약혼과 세 번의 파혼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세 번 약혼했다가 세 번 모두 파혼했다. 카프카의 저서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너와 헤어질 수 없지만, 같이 살 수도 없다. 카프카가 약혼녀에게 남긴 이 문장은 그의 소설처럼 부조리하다.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과 만났을 때 결혼을 결심하지만, 식이 코앞에 다가올 때쯤 도망친다. 카프카는 사랑에 속수무책이었고 이별에서도 서툴고 모질었다. 카프카의 복잡한 속내는 이제 문학 수사로 자리 잡은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용사를 짐작게 한다.

그는 한 편지에 이런 구절을 적어 놓기도 했다. “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그림책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같았지. 이따금 그 아이는 창틀로 길거리를 언 듯 보고, 곧 귀중한 그림책들에 되돌아가는 거야.”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과 만나는 설렘을 창문 틈으로 보는 대낮의 길거리에 빗댄다. 거리는 환하고 평온하다. 기꺼이 대로에 나가 그녀와 산책로를 거닐면 된다. 하지만 카프카는 곧 어두워지면 자신이 혼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을 잘 안다. 창틀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강렬하지만, 드리워진 창문의 아늑함에 저항하긴 어렵다. 연애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있지만 결혼은 다르다. 카프카는 결혼에 이르는 길목에서 주저앉음으로써 사랑의 몰락을 피했다. 권태를 회피하고 정점에서 떨어질 그들의 관계를 외면했다. 늘 연애를 원하면서도 막상 사랑이 불타오르면 그 정점을 떠올리고는 겁을 먹는 어리석은 자. 난 오늘 결혼을 준비하며 어려움을 호소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카프카를 떠올렸다. 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 공감을 가장한 무관심의 형태로 위로를 건넸다.

이승우의 정통 연애소설(?) <사랑의 생애>에도 카프카와 비슷한 형배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우리는 서로 호감을 느끼는 한 연인을 만날 수 있다. ‘카프카’처럼 사랑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 형배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 선희를 거절한다. 그가 어떤 상처를 가지든 간에 터무니없는 거절의 이유는 선희를 화나게 한다. 형배는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며, 마치 자신을 낮추는 듯 보이지만 실은 '사랑'을 하나의 자격으로 끌어내린다. 선희는 형배의 말에 “너는 마치 그 말을 독립선언문 낭독하듯 하고 있는 거 알아?”라며 경멸을 담은 말을 남기고 이별한다. 몇 년 후 형배는 친구의 식장에서 우연히 선희와 조우한다. 본인도 모르는 이유로 그녀에게 느닷없는 사랑을 느낀다.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선희의 귓바퀴에 새겨진 점이 그 촉매다. 그는 선희를 자주 만나던 시절에도 그 점(이승우가 만든 사소하고 별 거 아닌 무언가의 대명사)을 몰랐다. 명백한 건 사랑이라는 명제가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인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빗나간 사랑은, 끝내 깨닫지 못한 체 다시 살아났다.


사랑의 소멸


힘든 이별 경험이 있다. 몸이 무겁고 입이 텁텁해져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무차별로 쏟아지는 기억에 나자빠진. 그건 마치 치통과 같아서, 욱신거리는 환부가 와이파이 신호처럼 날 지배한다. 실연의 아픔을 다룬 창작물이 유치하다며 피하던 나를 한없이 우습게 만들었던 몸부림이었다. 신으로 하여금 평생 돌덩이나 짊어지고 살라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처럼 겨를 없이 아팠다. 아침에 일어나면 돌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자기 연민에 빠져 헤엄을 쳤다. 어쩌면 이별은 세상이 나 하나로 오므라지는 유일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만 살피고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분별하는 자기 수렴의 시간. 관성처럼 일과를 해치우던 습관에서 벗어나 온 세상이 내 비위를 맞춰야 한다. 그 감정을 연인을 향한 그리움으로 착각한다면 오산이다. 오로지 심혈을 기울이는 건 내 안위뿐이니까. 몽롱한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숙제처럼 해치우던 나를 깨우는 상실의 시간이다. 어렵사리 샤워하러 들어간 난 쏟아지는 물줄기에 두들겨 맞는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은 소설의 첫 문장처럼, 인간은 고작 사랑의 숙주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기생체는 종족 보존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전염될 뿐, 가리지 않고 이 인간 저 인간에 붙어먹는다. 이 지독한 놈은 약도 없어서 뜻하지 않게 생겼다가 그새를 못 참고 사라져 버린다. 소설 속 인물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사랑이 있지만, 말만 번지르르할 뿐 정작 사랑이 눈앞에 닥쳐도 옴짝달싹 못 한다. 내 사랑을 받아달라고, 날 버리지 말라며 끝내 이성과 거리가 먼 기행을 저지른다. 저마다의 사랑이 다르다는 건 그 증세를 예측할 수 없게 하며, 타인의 사랑을 측정 불가능하게 몰아붙인다. 사랑 안에 거하면 딴짓 안 해도 더할 나위 없지만, 내 뜻과 다르게 사랑이 사라지면 구제할 길이 없다. 오늘도 무수한 연인이 상대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헤어지자고 말을 할 테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모독이며 무책임한 입발림이다. 사랑이 사라지는데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랑의 시작 역시 까닭이 있을 터인데, 나는 예측할 수 없는 틈에 사랑에 빠진다. 이승우는 가장 보통의, 특별한 데라고는 없는 남녀의 '상열지사'에 주석을 달며 이 소설을 완성했다. 어느 카페에서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들의 속사정에 끼어들어 사랑의 불가해함을 증명한다. 


사랑한다는 말


<에로스의 종말>로 유명한 모로코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책을 읽었다. 그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일축하고 이런 말을 적는다. 

“왜 사람들은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자주 말할까. 이는 우연을 영원 속에 고정하는 것이다. 영원의 선언은 시간 안에서 실현되고 전개된다. 이런 ‘나는 너를 사랑해’가 섹스를 위한 술책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는 하나의 우연에서 지속, 끈기, 약속, 충실성을 끌어내겠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말은 의심스럽다. 달리 들으면 이 말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 딴 뜻이 있어서 하는 말로 들린다. 사랑은 순수하지만 말속에 속임수가 있다. 사랑을 볼모 삼아 행해지는 약속은 거짓이다. ‘카사노바’와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 여자는 행복했다. 하지만 ‘돈 주앙’의 연인은 이별 후 그를 극도로 증오한다. 카사노바는 하룻밤 풋사랑이든 여러 여자를 만나든지 진정한 사랑을 맹세했다.(그는 주장한다, 그 순간은 진정 사랑했다고) 반면, 돈 주앙은 사랑보다는 오로지 여자를 취하는 데 급급했다. 숫자와 기호의 의미로 여자를 경험했다. 그에겐 사탕발림이 없었고, 영원히 여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2019년 한국에 돈 주앙이 있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카사노바는 사랑의 주술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사랑한다는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순간의 마법은 알고도 당한다. 두 사람의 사후평가가 갈렸다면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입으로 놀린, 말의 주문을 아는 자의 승리다. 사랑이 최고의 선이고,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의 허위는 게으른 진실 못지않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에 혹해 사랑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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