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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1. 2019

끝내 이해받지 못한 말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저

 영화 <버닝>엔 오랜 시간 날 따라다닐 장면들이 있다. 저물어 가는 여름, 대남방송이 다 들리는 파주의 한 외진 마을에서 해미(전종서)는 춤을 춘다. 다 낡은 축사 옆에서 ‘팬터마임’같이 손을 휘젓는다. 포르셰에선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소리가 울리고 그녀의 몸짓은 점차 고조한다. 그 곁에서 정체 모를 남자 벤(스티븐 연)은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띤다. 또 다른 장면. 용산 다가구 주택가의 허름한 방, 도통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 고양이 곁에서 섹스하는 해미와 종수(유아인). 그때 창밖에서 희미한 빛이 침대 맡에 드리운다. 고개를 든 종수는 방을 관통한 그 빛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마치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다는 듯.


 두 장면이 내 기억 속에 새겨진 이유는 습관적인 의미부여 때문이다. 서사라는 좌표에 보풀을 일으키는 의미의 돌출에 난 주춤거린다. 능동적인 관람 태도일 수 있지만 어쩌면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증거일지도. 실제 위 두 장면은(적어도 내가 보기엔) 영화에서 특정 기능을 하지는 않는다. 복선이나 사건의 실마리도 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장면을 상기할만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 ‘의미부여’를 외면했다. 하지만 내 속에 새겨진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발화했다. 영화를 두 번째로 보았을 때, 위 두 장면이 주머니 속 조약돌처럼 달그락거렸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다 말고 해미의 춤을 떠올렸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가벼운 일상. 누군가의 한 마디에 마음을 쓰며 떨쳐내지 못하는 미련함. 난 가끔 내 속에서 들끓는 의미심장함에 못 이겨 글을 쓴다. 그건 쓰는 게 안 쓰는 것보다 더 재밌어서 그렇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날 옥죄어 옴에 버틸 재간이 없다. 얼마 전에는 내가 브런치에 쓴 글 댓글에 이런 의미부여, 지나친 장광설에 피로감을 호소한 분도 있었다. 한 마디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요약할 수 있는 질문이다. 나 역시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난 어쩌자고 한낱 문장 하나 얽매는 걸까.


 브링크 덕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었다. 스무 살 초입에 친 밑줄과 메모를 다시 읽어보며 킥킥댔다. 누가 볼까 무섭다. 마치 어릴 적엔 친하게 지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를 마주한 기분이다. 발걸음이 청량했던 그 청년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열병에 빠진 풋내기처럼 달큼한 메모가 가득하다. 관념적인 성애가 빈번한 이 소설을 그땐 침을 삼키며 읽었다. 하지만 막상 지금 보니 현실감이 결여된 문학적 수사에 가깝게 느껴졌다. 유럽 남녀의 도식적인 연애관엔 허무와 권태를 향한 지독한 염세가 스며있다. 


 책을 읽으며 번번이 멈춰 섰다. 유치하게 다투는 연인처럼 고비마다 꼬치꼬치 캐물었다. 의미라는 것이 찾을수록 무력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의 사변이니까. 서사는 앙상해도 그 주변에 선 쿤데라가 끝없는 의미의 터울을 만든다. 난 번번이 미끄러지면서도 그 안에 머물렀다. 이 작품은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대표되는 ‘파르메니데스’의 양가론을 끝까지 파고든다. 역사와 정치, 종교와 사랑, 대화와 섹스를 오가며 한없이 진자 운동한다. 쿤데라는 의미와 무의미라는 필생의 주제를 서술할 네 남녀를 등장시킨다. 인생이라는 생방송에서 밑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은 각본을 들고 견뎌내는 그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누군가의 농담에 의해 창작된 것처럼, 세상은 우연의 화살들이 빗발치는 경주다. 한쪽 편에는 모든 걸 우연으로 받아들이는 가벼운 이들이 왁자지껄하고, 반대편에선 의미에 살을 붙여가는 먹물들의 얼굴이 피로해 보인다. 난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쿤데라는 마지막 소설(아마도) <무의미의 축제>에서 세상의 모든 보잘것없음에 찬사를 보낸다. 죽음 앞에서 농담을 두려워 않는 가벼운 몸짓. 대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해 도리질 치다 책장을 덮었다.


 영화 <버닝>에서 해미는 부지불식간에 극에서 사라진다. 그녀라는 부재를 품은 종수는 남산이 보이는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허무함을 이기지 못해 처절하게 뭔가를 갈구했던 그녀를 춤을 떠올릴까. 종수의 소설에서는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조소를 떨쳐내고 끝내 외롭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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