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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6. 2019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저

#1

하루에 한 번 인스타그램을 켠다. 손가락을 놀리며 사진을 본다. 종종 내 사진도 하나 띄운다. 가장 잘 나온 놈으로 골라 필터까지 씌우곤 히죽히죽. 이미지 과잉 시대라고 한다. 어느 술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며 일갈했지만, 막상 방금 나온 커피를 찍어 올릴 땐 스스럼없이 편승한다. 문제의식을 느낀 건 아니다. 그저 버릇처럼 사진의 자극에 휘둘림에 불편하다. 난 책을 사랑하지만, 곧 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어느 학자에 동조한다. 이미지만큼 편리한 언어가 있을까. 웃는 이모티콘 하나면 기분 최고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쓰다가 톡이 오면 급한 맘에 엄지 척 이모티콘을 누른다. 짐짓 의연한 척해봐도 이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울적해진다. 내게 글로 서술되지 않는 세상은 가상이다. 어쩌면 책은 때 지난 레코드판을 고가에 매입하듯 아날로그의 흔적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로베르 두아노,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1950)

#2

눈을 뜨자마자 TV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라면 엄마의 온갖 구박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을 내가 그날만큼은 거실에 드리운 의미심장함에 기어 나왔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처박고 있었다. 온 가족이 TV를 주시한 채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본다. 난 졸린 눈으로 그 장면이 꼭 영화 같다고 중얼거렸다. 사람이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건 지구가 가루가 될 때 난 안전함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영화 속 인류가 죽어 나갈 때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꼰다. 스크린을 사이에 둔 체 현실 세계의 특권을 누린다.

뉴욕 시가지가 잿더미에 휩싸일 때 난 어떤 생각을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비행기 속에서 죽어갈 승객의 심정에 다가서지 못했다. 보도 화면 속 다급한 목소리와 다르게 난 평소처럼 세수하고 어머니의 미역국을 먹었다. 아니 불과 몇 해 전 수많은 학생이 숨죽인 채 수중으로 사라졌을 때도 난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앵커가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할 때도 난 멀뚱히 응시했다. 고통받는 그들과 엄연히 분리된 난 수치로 환산된 고통을 헤아렸을 뿐이다. 희생자 수가 카운트될 때마다 다리를 떠는 속도만 올라갔다. 그들은 엄연히 타자이고 오직 죄책감을 동반한 흥미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 작가 ‘이언 매큐언’은 9. 11. 테러에 관해 “비행기 납치범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승객의 생각과 느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을 계획했더라도 끝까지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는 이 말은 내게 그 자체로 문학이다. 이 바쁜 일상에서 왜 소설을 읽는가. 왜 문학을 위해 내 얇은 지갑을 열어야 할까. 어쩌면 글이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타자를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닐까. 비단 뒤늦은 속죄라 할지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로버트 카파,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1936)

#3

전 국민이 사진작가인 요즘엔 사진 한 장이 온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그만큼 진실의 증거로 여겨진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은 제한된 사실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사진엔 맥락이 거세되어 있으며, 사태를 호도하는 거짓 헤드라인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사진이 샷(shot)을 통한 프레이밍으로 피사체를 조정할 때 수많은 정보는 소실된다. 대중은 사진을 진실이라 철석같이 믿지만, 오직 제한된 정보만 접할 수 있다. 이 세상 누구도 SNS 속 그가 현실 세계에서도 같은 모습을 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사진작가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는 저널리즘 윤리를 말할 때 주로 인용한다. 독수리가 굶주린 흑인 소녀를 노려보는 이 사진은 작가에게 영예인 퓰리처상을 안겼다. 하지만 대중의 심판대에 오른 그는 몇 달 후 자살한다. 이 사진은 수단 문제에 대한 국제 여론을 환기했고, 아프리카 식량난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 사진의 진실은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얼마만큼 알 수 있을까. 손택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닌 서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함께 아파하는 것, 아니 그보다는 곧 죽을 그 아이가 나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 내가 누리는 특권이 굶주린 아이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상해야 한다.

“이런 사진들이 자아낸 연민과 메스꺼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머지, 그밖에 다른 어떤 사진들이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그밖에 어떤 잔악 행위들과 어떤 주검들을 보지 못하는지 물어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33쪽)


#4

난 <그것이 알고 싶다> 애청자다. 매주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에 흥미를 느낀다. 평소에도 범죄소설을 즐기며 연쇄살인을 다룬 <인 콜드 블러드>를 논픽션 걸작으로 꼽는다. 난 범죄에 내재한 자극에 도취한다. 수전 손택은 유럽이 제3세계의 참상을 보는 태도에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 아침 매끈한 셔츠를 입고 조간신문을 펼친 남자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해진 비극에 혀를 찬다. 하지만 두 시간 후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할 땐 모든 고통은 잊힌다. 나와 무관한 그들의 고통에 무력하다며 되뇔 테지. 고통받는 이를 타자화 시키는 순간 마음은 평온하니까. 그는 미처 실세계의 비극이 오락거리로 소비됨을 인지하지 못한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3기니>를 통해 ‘우리’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반전주의 기자가 버지니아에게 '우리'가 세계대전 발발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를 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이 물음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다. 당신은 나와 우리로 묶일 수 없다. 지금 인류의 비극이 남성성에 의해 발발하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과 같은 테두리에 있을까. 이 테두리 밖에 밀쳐진 타자는 어쩔 셈인가.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타인과 주체성이 생길 때는 언제일까. 난 몸이 아플 때 육신이 도드라짐을 느낀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매만질 때 나는 감각한다. 내 존재가 통증으로 수반하며 걸어간다. 고통이 극심해져 참기 어려울 땐 고통의 의미를 생각한다. 왜 신은 내게 이런 고통을 내린 걸까. 인류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 그 대상은 종교화였다. 순교를 상징하는 성서의 잔혹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모두 보통 사람의 평범한 죽음은 외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한다. 서로의 통증이 못지않음을 외면하는 순간 전쟁은 시작된다. 종교가 대의를 위해 무수한 이를 죽인 것처럼, 전쟁이 선의라는 허울에 속아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시작했다는 걸 기억하라. 우리라고 칭하는 순간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이를 돌아보라.



#5

브라질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 1944~)의 사진은 아름답다. 그가 찍은 제3세계의 참상은 사진으로 보면 매혹 그 자체다. 하지만 살가두의 시점 안에 선 사람은 박제된다. 대상화된 무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름 모를 이들은 살가두를 통해 추상화되어 피사체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고통이 폄하되길 원치 않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아름답게 연출한 사진 앞에서 관대하다. 연민 하나 던져주고는 쉬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고통의 범주화는 이처럼 내가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 논리에 있다. 나와 무관한 고통이라면 손쉽게 미학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의 마지막 단락에 한 전쟁 사진이 등장한다. ‘제프 월’의 <죽은 군대는 말한다>(1922)는 아프가니스탄 모로코 근처에서 사살된 소련군을 비현실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이 사진이 기묘한 이유는 영화도, 회화도, 광고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잔 손택은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 맥락이 거세된 사진은 아무런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채 남겨질 뿐이다. 우리가 다가서지 못한 그들의 죽음은 시간의 한 귀퉁이를 부유한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조차 궁금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 여지는 없다.

제프 월, 죽은 군대는 말한다

#6

 <타인의 고통>을 읽으며 줄곧 생각했던 건 지식인의 책무다. 손택은 글 곳곳에서 지난날 자신이 굳건하게 주장했던 생각을 고치고 또 고친다. 시대의 흐름과 사고의 연쇄작용에 따라 자기 생각을 정제하는 학자다. 탁월한 평론가이자 기자였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던 손택은 상대를 설득하는 글쓰기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풍부한 사유의 지층엔 여러 겹의 숙고가 있을 텐데 머릿속이 아득하기만 하다. 쉽지 않은 독서였지만 내 속 어딘가 공포와 혐오, 광기와 연민을 낱낱이 까발리는 기분에 내내 들끓었다. 안온한 문학에서 고귀한 품위를 지키던 내 일상을 폐허에 휩싸인 감정으로 몰아넣었다. 다시 한번 드는 생각은 결국 문학이란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비록 내가 그가 될 수 없기에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재차 숙고한다. 내 독서가 결코 헛되지 않기를, 지친 퇴근길에 놓쳐버린 무언가를 짚어낼 수 있기를.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154쪽)


표지 사진 : 네덜란드 하우스 도서관, 런던, 1940,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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