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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4. 2019

쿨하고 쓸쓸한 여행기

발칙한 유럽산책, 빌 브라이슨 저

여행은 그림의 떡인데 여행 에세이를 읽을 리 없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구글링이 낫다. 그게 아니면 서점에 가서 <론리 플래닛>을 사서 읽고 말지. 테마별 여행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북은 주변에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것도 여행이 닥칠 때 얘기지 일과의 수레바퀴 속에서 여행서가 웬 말인가. 난 그래서 일종의 문학 장르라 칭하는 여행 에세이와 서먹하다. 내 생각에 여행 에세이는 필시 허세나 떠는 된장녀의 사치 거나 멘토를 사칭한 고추장남의 구라다. 변수가 늘 출몰하는 여행에서 관광지만 따라다니는 그런 글 따위. 누군가 정해놓은 코스대로 심지어 식당 하나까지 답습하는 그런 짓 따위. 여행이란 일종의 서사처럼 고유한 맛이다. 독자적인 경험을 타인에 비추면 시시해진다. 내게 문학은 고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호사나 누리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부분의 여행서는 문학과 양립할 수 없다. 오히려 퇴근길에 잠시나마 걸어보는 여의대방로 밤바람이 내겐 그 자체로 여행이다.


발칙한 유럽산책


그렇다면 읽을 만한 여행 에세이는 없을까.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이다.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미국인 빌에겐 유럽을 향한 동경이 스며있다. 오랜 역사를 보존하고 그에 걸맞은 인격을 갖춘 유럽인을 향한 애정이 작품의 기조다. 늘 책을 달고 살며 거리엔 카페가 가득하고, 자그마한 땅덩어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을 보라. 유서 깊은 박물관과 아기자기한 공원에서 산책을 즐긴다. 발품을 조금만 팔면 곳곳에 자리한 미술관을 찾을 수 있다.

<발칙한 유럽산책>은 무용한 여행 에세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 여행자가 불쌍해 보인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온갖 불평을 해대는 통에 낭만이 깃들 새가 없다. 북유럽에 오로라를 보러 갔다가 호텔에서 싸운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 흑사병 책을 옆에 끼고 밤마다 바에 가서 만취한 채 잠이 든다. 늘 불만투성이에 온 도시에 대고 일갈을 늘어놓는다. 관광지는 사람이 많다고 피하고 식당에선 별 심술을 다 부려대는 통에 골치가 아프다. 빌은 대머리에 뚱뚱하고 배고프면 성질내는 전형적인 미국 꼰대다. 그에게 여행이란 허황된 환상을 벗기는 작업일 뿐이다. 가령 북유럽의 자발적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살인적인 물가에 시종일관 불평을 늘어놓는 건 빌 브라이슨만이 줄 수 있는 잔재미다. 빌에게 여행은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발칙한 유럽산책>의 저자 소개문에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 작가’라는 문구가 있다. 난 거기에 덧붙여 '세상에서 가장 박식한 여행 작가'라 말한다. 빌 브라이슨은 51년생 할아버지로 내가 그를 알기 훨씬 전부터 세계적인 작가였다. 런던에서 자랐고 결국 영국 명예시민이 되었다. 미국인이지만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힌다. 실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비틀린 영국식 유머를 느낄 수 있다. 빌 브라이슨은 '더 타임스'와 '인디펜던트'라는 거대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고, 그 기간 중 책을 몇 권 냈는데 족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국에선 '발칙한' 시리즈로 유명해 서점마다 스테디셀러에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발칙한’이라는 명명은 시큰둥하고 냉소적인 빌의 영국식 유머와 퍽 어울린다.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2008

발칙한 유럽산책을 카페에서 읽으며 구글 지도를 계속 켜놓았다. 빌이 걷던 거리와 호텔 심지어 성당과 박물관까지 스트리트 뷰로 검색하며 따라다녔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이 살아있는 ‘빈’의 실체와 이탈리아 국민 특유의 낙천성이 빚어내는 유쾌함을 엿본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리플리>의 배경으로 유명한 카프리섬은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빌은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안 보고 로마에선 콜로세움을 언급도 안 한다. 우선 인파가 북적거리면 피하고 낯선 도시의 작은 카페를 더 선호한다. 빌의 저질 농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터키 술집 주인, 광장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이탈리아 커플의 추태까지 자잘한 에피소드가 빼곡하다. 마치 프랙털(fractal) 현상처럼 지엽적인 사건에서 그 도시의 맥을 짚어내는 솜씨가 절묘하다.


1년 간 유럽에 살면서 이 책을 종종 읽었다. 매주 다른 도시를 거치며 이 책이 위로가 됐다. 난 기본적으로 여행을 힘겨워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선 매주 다른 도시를 떠나야 하는 압박에 시달렸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맛집과 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귀신처럼 따라다녔다. 요소마다 그득한 아시아 관광객들 틈바구니에서 휘둘렸다. 하지만 빌이 날 붙잡아줬다. 여행이란 결국 나만의 기억을 남기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빌은 책의 말미에 동유럽 여행을 마치며 피로감을 호소한다. 다음 여정이 그득하지만 멈춰 선다. 이스탄불에서 아시아의 넘실대는 물결을 상상하면서도 주저앉는다. 나 역시 소파의 아늑함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여행은 시작과 끝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마치 인생처럼 예측할 수 없지만 내 손으로 끝을 본다.


발칙한 미국 산책


빌은 모국인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유럽에 보내는 애정만큼 자국을 사랑할까.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산책>은 그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말까지 고향에서의 추억을 엮은 책이다. 학창 시절의 아이오와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한 묘사가 정겹다. 현재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정치와 가파른 번영의 결과가 초래한 인간적 황폐함에 대한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머무르고자 하는 회한이 짙게 느껴지는 책이다. 브렉시트로 영국이 한창 시끄러운 이때, 늘 시니컬한 빌 영감은 독설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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