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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0. 2019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저

화성 연쇄살인 미제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엔 상반된 두 형사가 등장한다. 동네 터줏대감 박두만(송강호)은 직감과 발품으로 사건을 대하는 형사다. 투박한 말투로 동네 곳곳을 쏘다니며 시비를 건다. 반면 연쇄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시골 강력계에 새로 부임한 서태윤(김상경)은 서류에 목을 매는 사람이다. 그는 남다른 분석력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에 다가선다. 과학수사라는 말이 없던 시절임에도 범인의 패턴을 분석해 용의자를 추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역시 박두만과 다를 바 없이 변해간다. 용의자를 증거도 없이 잡아들이고 사슴 같은 눈을 한 박해일을 윽박질한다. 서태윤이 직면한 어둠은 수치 바깥 존재다. 인간의 지성이 닿지 못하는 곳에 악마가 숨 쉰다. 불가지론은 인간 문명을 냉소하며 우리 뒤에 우두커니 서 있다. 두 형사는 80년대, 막 저개발의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던 당대를 표상한다. 영화는 시대의 미숙함과 더불어 인간이 맹신하는 지성의 무력한 몰골을 비춘다. 뭐든 다 알 수 있다는 사회과학이 판치는 요즘에도 여전히 서울 시내에 교회당이 그득한 이유다.


데이터에서 찾아낸 낙관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쓴 ‘김승섭’의 글은 단정하다.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하거든요'를 버릇처럼 되뇌던 서태윤처럼 논거를 바탕으로 한 저술이다. 김승섭은 사회 역학자라는 직함처럼 수치 뒤에 숨겨진 아픔을 발굴한다. 차트와 표를 그려 넣고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한 문장을 적는다. 그가 숫자와 씨름해서 다다른 타인의 고통은 엄연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특정 사안에 착안해 해법을 제시한다. 눈의 비늘을 벗겨주는 통찰을 좇기보다는 서류에 파묻힌 상처를 매만진다.

서태윤 형사, 출처 : 살인의 추억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가짜 뉴스에 얼마나 시달려 왔던가. 거짓이 횡횡하는 광장에서 찾아낸 건 상식이 무너진 사회였다. 김승섭을 읽으며 마음이 편했던 건, 그가 오로지 사실만을 말한다는 신뢰 덕분이다. 김승섭은 결코 속단하지 않으며 섣부른 낙관을 일삼지 않는다. 서태윤이 영화에서 절감한 서류의 한계를 김승섭은 겸허히 인정하며 글을 쓴다. 우린 결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으니,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적는다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옳은 얘기만 하는 작가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가 추려낸 사실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쩐지 미심쩍었다. 김승섭의 저서 두 권을 연달아 읽으며 그가 지나치게 천진하다고 느꼈다. 난 종종 인간은 다 틀려먹었다고 냉소한다. 기대할 게 없으니 나아지길 바라는 바도 적다. 난 그가 제시한 옳고 그름이 시시했다. 특정 귀결에 도달하기 위해 억지로 추린 데이터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책 말미에 가니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과학이란 불변의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 열쇠가 아니다. 시간에 켜켜이 쌓이고 수많은 노고가 모여 또 다른 진리를 생산한다. 중요한 건 해답에 다가서는 과정 그 자체다. 납득 가능한 근사치를 찾아내서 현실에 접목하는 과정이 과학이다. 오히려 상식이라는 이유로 의심하지 않고 안주하면 변화는 요원하다. 김승섭은 좋은 의미에서 순수하다. 젊은 학자 특유의 선의가 믿음직스럽다. 시대가 원하는 지식인은 어쩌면 앞날을 외면하는 비관주의자의 책상이 아니라, 그래도 커튼을 열고 창문 밖을 살피는 몸짓에 있지 않을까.  


지식인의 역할


난 종종 특정 분야에 통달한 학자의 글을 읽는다. 호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몇 장 읽다 포기하고 만다. 그러면 다시 검색을 통해 우회로를 찾는다. 해당 분야를 가볍게 쓴 교양서를 택해 문턱을 낮춘다. 학자 출신 작가는 종종 대중을 간과한 글을 쓴다. 스토리텔링을 등한시하고 문장을 다듬지 않아 읽기 어렵다. 김승섭은 전문가의 식견과 단아한 문장을 겸비한 부러운 사람이다. 좀 안다고 젠체하지 않고 겸손하다. 어떤 분야든 일정 수준에 다다른 사람은 핵심을 말한다. 본질을 꿰뚫은 사람은 장황하지 않다. 김승섭은 현대 지성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적는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저자 김승섭

어릴 적 수학 문제를 풀며, 숫자놀음은 사는 데 도움될 게 없다고 툴툴거렸다. 하지만 요즘엔 오히려 과학 서적을 더 사들인다. 진리에 닿고 싶어 여러 분야에 기웃거린다. 세상은 문학 외에도 첩첩산중에 놓여있다. 요즘 서점을 둘러보면 한국 인문학 열풍이 과학기술로 옮겨 붙는 모양새다. ‘유발 하라리’, ‘리처드 도킨스’, ‘제러드 다이아몬드’, ‘스티븐 핑커’ 책을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과학을 위시한 대중과학 역시 인문학 못지않게 흥미롭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주를 건너지 않고는 인류의 실체를 온전히 알 수 없음을 설득한다. 빅뱅과 블랙홀을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나 보던 이들이 이제 <인터스텔라>에서 양자역학을 논한다. 인터넷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째로 손바닥에 불러왔고, 정보의 양보단 쓰임을 더 생각하는 시대에 도래했다.

책이 세상을 향해 일갈하면 더 잘 팔린다. 인류를 비관적으로 바라볼수록 인기가 많다. 학자가 희망을 얘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세상은 돼먹지 못한 꼴로 뉴스를 더럽히고, 책에다 희망을 얘기하면 네티즌은 책상물림이 속 편한 소리나 한다며 냉소한다. 세상은 서로 믿는 바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아무도 쉽사리 낙관할 수 없다. 성경의 시작은 우주 창조, 이스라엘 민족 태동이라는 두 가지 내용이다. 신이 아담과 화훼를 만들었으니 우리는 태초를 손에 쥔 채 이 책을 읽는 셈이다. 하지만 서점에서 발길을 돌려 사회과학 코너에 다다르면, 우리 조상이 물고기이며 온갖 복잡한 우연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로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이런 양상에서 학자의 글은 자그마한 위로가 된다. 값싼 동정이나 위선이 아닌 사무실 가득 쌓인 서류에 안도한다.

렘브란트,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굽어보는 마음으로


누군가 동네 길고양이에 밥을 주는 이웃을 비난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한국에서도 밥 한 끼 해결하기 벅찬 노숙자가 태반인데 기껏 고양이한테 비싼 밥을 주냐는 타박이다. 어찌 보면 맞는 말처럼 들린다. 지구 반대편을 생각해주는 사려에 감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존재에 긍휼을 품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지구 반대편을 떠올릴 수 있을까.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17세기 의료 시술 과정을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그림에 새겼다. 네덜란드 실존 인물 ‘툴프 박사’는 시체를 해부하고, 주변 학생들은 이를 '뚫어져라' 구경한다. 은은한 조명 주위로 그들의 얼굴이 섬뜩할 만큼 또렷하다. 근엄한 얼굴을 한 박사와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환부가 적나라하다. 난 그림을 보며 내 시선을 의심한다. 난 어디에 서서 이 그림을 보는가. 구경꾼인가 아첨꾼인가. 짐짓 이 그림을 살피다 집도하는 의사 뒤로 의료 서적을 펼친 또 다른 학생을 발견한다. 다시 한번 물어본다. 난 어떤 표정으로 타인 앞에 서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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