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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0. 2019

나는 기억한다 별걸 다

나는 기억한다. 영화를 보고 북촌을 걷던 시간을. 고현정을 닮은 사람을 보고 무작정 따라갔다.

나는 기억한다. 밤새도록 소설 화차를 읽다가 한 숨도 안 자고 등교하던 때를. 그땐 맨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던 시간이 내 유일한 숨통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김성재가 죽었던 날을.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펐다.

나는 기억한다. 정독도서관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떠들던 시간을. 온갖 음담패설에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그때 먹던 커피가 뭐였더라.

나는 기억한다. 명절에 창경궁을 혼자 걷던 밤을. 그땐 왜 그리 혼자가 되고 싶었을까. 지금처럼 원 없이 홀로 살진 너도 몰랐겠지.

나는 기억한다. 처음 복근이 생겼던 날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네.

나는 기억한다. 노래방에서 누군가를 의식하며 노래를 불렀던 것을. 1절 끝나고 간주쯤에 슬쩍 보고 나서야 알았다. 나도 곧 연애를 하겠구나.

나는 기억한다. 부모님이 심하게 싸우던 밤을. 잔뜩 위축된 난 불안한 맘을 달랠 길이 없어 형한테 말을 걸었다. 근데 그 나쁜 놈은 버럭 화만 냈다. 무심해 보였던 형이란 놈도 그 시간이 나 못지않게 고달팠으리라.

나는 기억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던 밤을. 평생 문학을 읽을 수 있다면 내 초라한 삶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나는 기억한다. 처음 유럽에서 집을 구하고 근처 툴루즈 시내를 걷던 시간을. 온통 새카만 낯섦이 날 환대하는 것만 같았지.

나는 기억한다. 테니스 라켓으로 공을 튕겨내던 코트를. 손에 감기는 감각과 뻗어나가는 공의 궤적이 또렷하다. 세포가 일제히 봉기하는 기분이랄까. 그땐 내가 얼마나 많은 장비들을 사들여댈지 몰랐었어.

나는 기억한다. 옥희의 영화에서 본 정유미를. 그렇게 예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네.

나는 기억한다. 처음 맥북을 두드리던 감촉을. 맥북만 있으면 좋은 글이 나올 줄 알았지.

나는 기억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샤워실에 기대 한참을 서 있던 시간을. 물줄기가 날 때려죽이네.

나는 기억한다. 손의 감촉을 의식하며 걷던 길의 생김새를.

나는 기억한다. 처음 내 집이 생겼을 때를. 다시는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치 혼자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나는 기억한다. 처음 벤치 프레스 백 킬로를 들던 때를. 쇳덩이와 친해져서 많은 걸 얻었네.

나는 기억한다. 그 애 번호가 9310, 근데 뒷자리가 뭐더라. 그다음이 뭐더라.

나는 기억한다. 헤어지고 싶었던 때를. 헤어질만한 상대가 되려던 나를. 그저 그렇고 그런 기억으로만 남았네.

나는 기억한다. 처음 김애란을 읽었을 때를.

나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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